나는 내가 아니다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늘 한결같아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이 말은
금강경에서 전하는 최고의 가르침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남이 자기 몸에 해를 입혔을 때 상대를 원망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부처가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 부처가 전생에서 수행할 때 이름)으로 수행하고 있을 때 직접 겪은 일이다.
부처가 숲에서 선정을 하고 있는데, 가리왕(歌利王)이 궁녀들을 데리고 놀러 나왔다. 왕이 실컷 먹고 잠이 들었을 때, 궁녀들이 선정하고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 그의 옆으로 모여들었다.
선인이 궁녀들에게 자비와 인욕에 대한 이치를 이야기해 주자 궁녀들이 떠나지 않고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리왕이 잠에서 깨어 보니 궁녀들이 선인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 것이 아닌가. 왕이 노발대발하며 선인에게 외쳤다.
“뭘 하고 있는 게냐?”
선인이 대답했다.
“인욕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네 수행이 얼마나 깊은지 시험해 보아야겠다. 내가 이 칼로 너의 귀와 사지를 잘라도 네가 화를 내지 않는다면, 네가 인욕 수행을 하고 있다는 걸 믿어 주마.”
왕이 칼을 번쩍 쳐들어 선인의 사지를 난도질했지만, 선인은 태연하기만 했다.
왕이 물었다.
“이래도 성이 나지 않는단 말이냐?”
선인이 대답했다.
“인욕을 수행하고 있는데, 어찌 성이 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늘 한결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최고의 경지다.
부처가 이때 어떻게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금강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부처에게
“아상, 인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내가 옛적에 온몸이 마디마디와 사지가 찢길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상(無相)’,
즉 형태가 없는 것이다.
무상의 경지에 들어서야만 해탈할 수 있고, 육신의 제약에서 벗어나 무한하고 심오하고 광활한 경지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무상의 핵심은 바로
무아(無我)다.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근본이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나의 몸이 없다면 무슨 번뇌와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해탈하려면 반드시 무아를 이루어야 한다. 불교에서 무아는 세 가지 기본 원리 중 하나이며,
다른 두 가지는
‘무상(無常)’과 ‘열반(涅槃)’이다.
여기에 ‘고체(苦諦)’를 덧붙여 사법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기본 원리에 따라 부처의 기본 사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개고(諸行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사물은 생겨나면 반드시 사라지며, 정해진 형태가 없이 수시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제행개고란
모든 사물의 운행에는 고통의 씨앗이 심어져 있다는 의미이며,
제법무아란
모든 사물의 운행에는 정해진 주체가 없다는 말이다.
열반적정이란
생사윤회를 초월해 적정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이 최종적인 해탈이라는 뜻이다.
무상, 고체, 열반은 이해하기가 쉽지만,
무아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당나라 때 방거사(龐居士)라는 유명한 거사가 있었다. 어떤 승려가 금강경을 가지고 설법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무아’와 ‘무인(無人)’에 대해 설명하자 방거사가 물었다.
“나도 없고 남도 없다면,
지금 누가 이야기를 하고 누가 듣고 있는
것이오?”
그렇다.
내가 없다면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무아를 수행하고자 할 때 대부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할 것이다(실존주의에서는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존재의 근본을 묻는다).
나는 바로 나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나는 또 누구인가? 이 문제는 대답하기 힘들다.
한 대학생이 철학 교수에게 질문했다.
“저를 고민에 빠뜨린 문제가 있습니다. 이따금씩 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 철학 교수가 반문했다.
“자네가 존재한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학생이 대답했다.
“바로 접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어떤 여자가 불행한 인생에 절망해 자살했다. 그녀가 천당 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천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신가요?”
“마리 블래커라고 해요.”
“이름이 뭐냐고 묻는 게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지 묻는 거예요.”
“교사예요.”
“당신 직업을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누구시죠?”
“잭의 엄마예요.”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누구시죠?”
“파인트리 가 28번지에 살아요.”
“주소를 묻지 않았어요. 당신은 누구시죠?”
결국 마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는 불교의 문답집인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단락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 책에서 나가세나가 밀린다 왕에게 물었다.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머리털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신체의 각 부분을 차례로 들며 그것이 나가세나인지 물었다. 밀린다 왕이 모두 아니라고 대답하자 나가세나가 말했다.
“이렇게 자세히 물어도 나가세나가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가세나는 그저 허무한 소리일 뿐입니다.”
나가세나는 ‘나’란 실제로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와 이름이 조합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를 통해 재미있게 설명했다.
무상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여러 가지 인연이 합쳐진 것이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다.
《잡니가야(雜尼迦耶)》라는 불서를 보면, 부처가 고체의 관점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육신이 내가 아님을 이렇게 설명한다.
“육신(色)은 내가 아니다. 만일 육신이 나라면 육신은 고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 몸을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육신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모두 내가 아니며, 최종적으로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무지한 사람은 4대 원소의 산물에 불과한 나의 육신을 나라고 여기고 마음이 곧 나라고 억지로 우긴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4대 원소의 산물인 육신을 1년, 2년, 3년, 4년,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100년 심지어 그보다도 더 오랫동안 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말하는 마음, 의식 같은 것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숲에서 뛰어다니는 원숭이처럼 이 가지를 붙잡았다가 저 가지를 팽개쳤다가 하기 때문이다.”
부처의 뜻은 분명하다.
그가 말한 무아란
내가 없다는 뜻도 아니고,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그 누구도 확정적이고 절대적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자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결국에는 금강경의 핵심인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나는 여러 인연이 합쳐진 것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그런 나에 무엇 때문에 집착하는가?
그러니 최고의 ‘집착하지 않음’은
바로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초조하지 않게 사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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