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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보시, 즉, 버리는 일

 


버리면 
비로소 얻는 것들
 
 
 
 
사제와 무상(無常,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과 변화를 겪음), 12인연, 육도의 이치를 이해하고, 심지어 《법화경》에서 말하는 일불승의 심오한 이치까지 이해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글귀만 보고 이해했을 뿐, 자리에서 일어나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식탐이 생기고 돈과 명예를 좇고,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화가 왈칵 치밀기도 하고 갑자기 우울해지기도 한다. 자기 몸인데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난 네가 싫어.”
 
많은 이치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자신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자기도 모르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 모든 이치를 다 이해할 수 있어도 자신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가 〈제바달다품〉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나는 열심히 보시를 했다. 코끼리, 말, 금, 은, 유리, 나패, 마노, 진주, 매괴 등 진기한 보물과 나라, 도성, 아내, 자식, 노비, 시종 등을 아낌없이 보시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내 몸까지 내놓았으며, 심지어 내 머리, 눈, 골수, 뇌, 뼈, 살, 손, 발까지도 아낌없이 남에게 보시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의 수명이 길었지만 나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 나라를 태자에게 맡겼다. 그런 다음 북을 크게 울리며 백성에게 명을 내려 

‘내가 사방에서 불법을 구하고 있다. 누가 내게 대승법의 이치를 설해 준다면 내 평생 그의 종이 되어 그의 시중을 들 것이다’라고 했다.”
 
《법화경》의 불법이 아무리 오묘하고 불가사의해도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리 불가사의한 이치를 알고 있다 해도 현실에서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불타는 집에 갇혀 걸어 다니는 시체와 다를 바 없다. 부처의 성불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그 여정을 거치는 동안 그가 숲속에 앉아 명상만 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에게 설법만 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게만 했다면 부처는 기껏해야 위대한 학자밖에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부처는 학자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깨워 낸 선구자였으며, 자신의 행동으로 자기 생명과 이 세상을 변화시킨 성자였다.


부처는 가장 기본인 ‘보시’부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수시로 바뀌고, 
끊임없이 원하고 더 많은 걸 갖고 싶어 하며, 
이미 가진 것을 끈질기게 지키려고 한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의 인생은 사실 소유와 집착 사이에서 울고 웃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이와 정반대라면 당신은 이미 부처다.
 
석가모니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생명을 남들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남들은 끊임없이 가지려 하고 지키려 할 때 
그는 끊임없이 버리고 내어주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더 이상 버릴 것도 없어지면 자신이 원망스러울까? 
아니면 자신을 좋아하게 될까?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 수 있을까?

말로만 논해서 되는 이론이 아니다. 
이 이치를 알았다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부처가 성인으로 불리는 것은 자신의 학설과 견해를 현실에서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왕자였지만 사람들의 삶이 행복하지도 않고 길지도 않은 것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겼고, 깨달음을 얻은 뒤 왕위를 버리고 출가했다.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과 뒤섞여 살다가 
결국 세상을 뒤로하고 떠난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허공으로 갔다.

왕위를 포기한 것이 별 일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 나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소크라테스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했고, 

《홍루몽》의 임대옥은 
“만났다가 헤어지느니 차라리 만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했으며, 

부처는 
“생명의 끝은 죽음이다”라고 했다. 

모든 노력이 결국 ‘무’로 돌아간다면 
처음부터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하지 않는 게 나을까?
 
이 글에 달린 많은 댓글 중 대부분은 
어떻게 겪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평생 자전거만 타는 것과 페라리를 타 본 뒤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중국의 유명한 이모티콘 캐릭터 투즈키의 어록 중에 

“지나온 인생길을 되돌아볼 때 제일 두려운 건 그 길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 인생이 공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페라리를 타게 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파산 끝에 빈털터리가 되어야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한 후 다 내려놓았다며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이건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포기당한 것이다. 반면 부처는 페라리를 타다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포기했다. 심지어 자전거도 스스로 마다했다.
 

중요한 건 ‘버림’이다. 


부처는 자신이 페라리를 타는지 자전거를 타는지 관심이 없었고,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지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 사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부처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들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지였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고 마음껏 날고 싶다면 그것들을 버려야만 한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진 채 날아오르기를 꿈꿀 수는 없다. 
부처는 번뇌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어서 빨리 그 짐을 버리라고 했다. 

몸에 있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속세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 
속세에 없는 모든 것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돌고 돌며 했던 일은 바로 


보시, 
즉, 버리는 일이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래 전 한 문학 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 몇몇 노교수가 요즘 사람들이 배금주의에 물들어 윤리적으로 타락했다고 성토했다. 

그러자 한 여성이 대뜸 
“돈이 그렇게들 싫으시면 제게 주세요! 
저는 돈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교수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그녀에게 자기 돈을 내어준 사람도 없었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자기 돈을 남에게 주라고 하면 선뜻 내어주기 힘들다. 
자기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한다. 


하지만 부처는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잃을까봐 늘 초조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당신의 것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 세상이 당신을 어쩔 수 있겠는가?

         
            법화경 마음 공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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