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었다”는 마음에서 얻은 것이니, 이른바
‘일없는 도인(閑道人)’이다.
아! 그 사람됨이 본래 인연에 집착하지 않고, 본래 일이 없어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며, 녹수청산을 마음대로 노닐고, 어촌과 주막에서 걸림 없이 편안하고 한가하게 보낸다.
세월이 오고가는 것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봄이 오면 여전히 풀빛은 절로 푸른 법이다.
絶慮忘緣者는 得之於心也니 所謂閑道人也라. 於戱라, 其爲人也가 本來無緣하고 本來無事하여 飢來則食하고 困來則眠하며 綠水靑山에 任意逍遙하고 漁村酒肆에 自在安閑이라. 年代甲子를 總不知하나 春來依舊草自靑이로다.
송(頌)
사람이 없는가 했더니,
한 사람이 있구나.
將謂無人이러니
賴有一個로다.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는 사람은 외도(外道)요, 마음에 집착하여 부처를 삼는 사람은 마군(魔軍)이다.
무릇 기용(機用)을 잊는 것이 부처의 도(道)요, 분별하는 것은 마군의 경계다.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텅 비고 밝은 마음이 저절로 비출 것이다.
離心求佛者는 外道요 執心爲佛者는 爲魔라. 大抵忘機는 是佛道요 分別은 是魔境이라. 又分別을 不生하면 虛明이 自照이리라.
유마거사께서, “내 본성이 본래 깨끗하니 곧바로 활짝 열면 도로 본심을 찾으리라” 하시고, 또 “한 깨달음에 곧바로 부처의 세계에 이르리라”고 하셨다.
淨名이 云 “我의 本性이 元自淸淨하니 卽時豁然하면 還得本心이라” 하시며 又“一悟에 卽至佛地라” 하시니라.
조사께서, “본성(本性)은 자체가 청정한데, 마음을 일으켜 깨끗하다는 것에 집착하면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집(妄執)이 일어날 것이다. 망집이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으나 집착하는 것이 (곧) 망집이니, 만약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지 아니하면 자연히 망집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祖師가 云, “性自淸淨하니 起心着淨하면 却生淨妄하리라 妄無處所하여 着者가 是妄이니 若不生心動念하면 自然無妄이라” 하시니라.
교문(敎門)에서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을 전하고, 선문(禪門)에서는 오직 견성법(見性法)만을 전한다. 마음이 곧 성(性)이요, 성이 곧 마음이다.
敎門에는 惟傳一心法하시고 禪門에는 惟傳見性法하시니 心이 卽是性이요 性이 卽是心이니라.
마음은 거울의 바탕과 같고, 성품은 거울의 빛과 같다. 성품은 그 자체로 맑고 깨끗한 것이므로 곧바로 활짝 깨치면 곧 본마음을 찾을 것이다. 이것은 깨친 한 생각[一念]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心은 如鏡之體요, 性은 如鏡之光이라. 性自淸淨하니 卽時豁然하면 還得本心이라. 此는 秘重得意一念하니라.
송(頌)
겹겹으로 두른 산과 물이여,
맑고 깨끗한 내 고향 면목이로다.
重重山與水여
淸白舊家風이로다.
평(評)
평하여 말하였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본바탕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무명(無明)이 형상을 취하는 마음이다.
성품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근본이 되는 성품이요, 다른 하나는 성품과 형상이 마주 선 성품이다.
그러므로 선법을 닦는 이와 교법을 배우는 이들이 다 같이 어두워서 이름에만 집착하고 알음알이를 내어 혹 얕은 것을 깊다 하고 혹 깊은 것을 얕다 하여, 공부하는 데[觀行]에 큰 병통이 되므로 이를 가려서 말한 것이다.”
評曰, “心有二種하니 一은 本源心이요, 二는 無明取相心也라. 性有二種하니 一은 本法性이요, 二는 性相相對性也라. 故로 禪敎者가 同迷守名生解하여 或以淺爲深하며 或以深爲淺하여 遂爲觀行大病인 故로 於此辨之” 하노라.
마음은 묘(妙)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이니 거울의 빛과 같고, 성(性)은 밝은 본성 그대로 묘한 것이니 거울의 본체와 같다.
선가귀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