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리는 침묵에서 태어나서 침묵으로 돌아가서 소멸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도 침묵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침묵은 소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소리, 모든 곡조, 모든 노래, 모든 말이 지닌 특성이며 동시에 현시되지 않은 세계의 일부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서 침묵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침묵만큼 신성한 것이 없다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 사이의 무언(無言)의 틈새를 의식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내면은 점차 고요해질 것입니다. 내면이 고요하지 않으면 침묵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밖에는 침묵이 흐르고 안에는 고요함이 자리잡으면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소리가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없듯, 빈 공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체든 몸이든 모두 무(無)에서 나와서 무에 둘러싸여 있으며 결국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물체 내부에도 ‘유’보다는 ‘무’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이 딱딱하게 보이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육체를 포함해 겉으로 고체처럼 보이는 것도 원자의 크기에 비교하면, 그 원자들 사이의 거리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당신육체나 단단한 고체도 거의 완전히 빈 공간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모든 원자의 속은 거의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고체의 입자 또한 입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진동에 가깝습니다.
불교도들은 2500년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고대 불경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色卽是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만물의 본질은 공(空), 즉 ‘비어 있음’이라는 말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 침묵으로 현존할 뿐아니라 우주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모두가 공간 속의 물체에 주의를 기울일 뿐, 공간 자체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비어 있음’또는 ‘무(無)’라는 것이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신비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말 같군요. 그 ‘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무(無)를 유(有)로 만들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무를 유로 만드는 순간, 당신은 무를 놓치게 됩니다.
무, 즉 공간이란 현시되지 않은 세계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세상 속에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으며, 이 말도 일종의 역설입니다.
무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에 대해 연구한다 해도 당신은 그것으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공간을 연구할 때, 그들은 보통 그것을 유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으로써 그 본질을 완전히 놓쳐 버리고 맙니다.
당연하게도 최근의 이론은 공간이 비어 있지 않으며, 어떤 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단 어떤 이론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법입니다. 적어도 다른 이론이 나올 때까지는 말입니다.
‘무’를 붙잡거나 이해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무’가 현시되지 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여기에서 하고 있는 것이 ‘무’를 이해하려는 시도 아닌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어떻게 하면 삶 속에 가져올 수 있는지 가리켜 보여줄 뿐입니다.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해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간에는 아무런 존재도 없습니다.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는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공간에는 아무런 존재도 없지만, 그 공간은 다른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합니다. 침묵 역시 아무런 존재도 갖고 있지 않으며 현시되지 않은 세계 또한 그렇습니다.
공간 속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공간 자체를 인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방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가구, 그림 등은 방 안에 있지만 그것들이 방은 아닙니다. 마루, 벽, 천장은 방의 경계를 이루지만 역시 방은 아닙니다. 그러면 방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물론 비어 있는 공간입니다. 공간이 없이는 방도 없습니다. 공간은 ‘무’이므로, 우리는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주위의 공간을 인식하십시오.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느끼십시오. ‘무’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렇게 하다보면 당신의 내면에서 의식의 이동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구, 벽 등과 같은 공간 속의 대상과 상응하는 마음의 대상들, 이를테면 생각이나 감정, 감각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간과 상응하는 것은 의식입니다. 공간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듯 의식은 마음의 대상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공간 속의 대상인 사물로부터 주의를 거두면, 당신은 자동적으로 마음의 대상들로부터도 주의를 거두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언가 생각을 내면서 공간이나 침묵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 주변의 빈 공간을 인식함으로써 당신은 동시에 무심의 공간을, 순수 의식을,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공간에 대한 묵상이 하나의 문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공간과 침묵은 본래 동일한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그것들은 내면의 공간과 내면의 침묵이 외부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은 고요함이고,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무한히 창조적인 자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차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내면의 공간도 고요함도 없이, 늘 균형을 잃은 상태로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세계를 알거나, 최소한 세계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신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형상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형상을 지닌 모든 것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잘못 인식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