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자신이 현상계의 존재들이 생성되는 맑은 마음임을 알 때 당신은 현상계에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제 당신은 상황과 장소와 조건 속에서 자아상을 찾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만물이 그 무거움과 심각함을 떨궈버린다. 당신 삶에 슬며시 장난기가 들어온다.
이제 세상은 우주의 춤이다. 형상의 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본연의 모습을 알 때 살아있는 평화로움이 언제나 거기 있다. 그것을 기쁨이라 불러도 되겠다.
기쁨이란 바로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평화로움이니까. 그것은 생명이 아직 형상을 취하기 이전의 모습, 생명의 실체로서의 당신 자신을 아는 기쁨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기쁨,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기쁨이다.
물이 고체·액체·기체로 존재하듯이 순수의식도 ‘동결되어’ 물체로 존재하고, ‘액체화되어’ 마음과 생각으로 존재하고, ‘형상을 여의어’ 순수의식으로 존재한다.
순수의식은 형상화되기 이전의 생명이다. 그 생명이 ‘당신’의 눈을 통해 형상의 세계를 본다. 순수의식이 당신이니까.
당신이 그런 존재임을 알고 나면 당신은 세상만물 속에서 당신 자신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온전히 맑고 명료한 인식의 상태이다.
이제 당신에게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과거가 없다. 당신의 체험을 걸러주고 해석해 주는 관념의 필터 역할을 하는 과거가.
아무런 해석 없이 지각작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당신은 지각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 언어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은 깨어있는 고요함의 장 안에서 지각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당신’을 통해서 형상을 여읜 순수의식이 자기 자신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삶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욕망은 무언가를 ‘더하여’ 좀 더 풍성해지려는 욕구이다.
반면 모든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어’ 자신이 작고 초라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더하고 잃어버리는 두 가지 활동은 생명이란 것이 본래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풍요한 생명은 이미 지금 이 순간 당신 안에 존재한다.
- 고요함의 지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