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문禪門

필경에 얻음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어떻게 도를 얻습니까?

 

 

 

필경에 얻음으로써 얻음을 삼는다.

 

 


 

어떤 것이 필경에 얻음입니까?

 

 

 

얻음이 없으며, 얻음이 없음도 없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필경에 얻음이라고 한다.

 

 


問 云何得道

 

答 以畢竟得爲得

 

 

問 云何是畢竟得

 

答 無得無無得 是名畢竟得也


 


완전히 부정해서 쓸어버리면 마지막에 가서는 할 말이 없는데, 그럼 그것이 뭡니까? 하니 이걸 가지고 이름하여 증득했다고 하고, 무심이라고 하고, 무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얻을 것이 없다’고 하면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있으니까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그것 조차도 없다고 모조리 쓸어서 부정합니다. 이럴 때에 이름 붙이기를 필경에 얻은 것(畢竟得)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보통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그것도 없다’고 하면 전부 없는 것으로 끝납니다. 아주 없는 것으로 끝내 버리면 결국에 아주 없다고 하는 단견에 떨어지게 되니까 다시 돌아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이름해서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유위법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금덩어리가 없던 것이 하나 생기면 얻는 것이고, 돈도 없다가 많이 벌면 얻었다고 하는 것이고, 또 대학 졸업하고 박사과정 밟아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얻었다고 하고. 이 세상은 전부 그런 것을 가지고 얻었다고 합니다.

 

 

“얻을 것이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것도 없다는 이것을 이름해서 필경에 얻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이렇게 다시 살아 올라와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이 항시 두 가지 양변의 덫에 걸려서 일생을 그걸 가지고 살아가는데 상대가 있고 내가 있고 음과 양이 있고, 옳고 그른 것이 있고, 전부 상대적인 원리의 생활 테두리 속에서 살다가 보니까 그 굴레 속에 얽매여 가지고 자유를 못 얻습니다.

 

그래서 이놈을 모조리 부셔버리고 쓸어버리고 난 뒤에 허공을 보니 구름이 벗어진 만 리에는 또 만 리라, 끝이 없습니다. 땅덩어리 이게 다 무너지고 없어지고 나니 발밑으로도 또한 끝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시 뭐냐? 하고 돌이켜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얻은 것이다. 공의 자리를 체득한 것이다.”

 

“공의 자리를 체득하고 나니까 뭐냐?”

 

“공도 아니더라.”

 

“공이 아니면 뭐냐?”

 

“있는 것이다.”

 

아주 없다고 모조리 쓸어버리고 난 뒤에 다시 있다고 했습니다. 뭐가 있냐? 묘유다.

 

자유롭게 쓴다, 천하에 걸릴 것이 없다, 무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무애자재한 이것을 중생들이 바로 알아야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인생의 참가치를 알 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양새가 달라집니다.

 

중생심의 두 가지 양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그놈이 무너지고 나서 다시 되살아 올라온 그 물건하고 살아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리적인 것으로 실제로 깨달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 경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와서 물어보면 이렇게 문답한다고 합시다.

 

“아 그거 본래 없다.”

 

“없으면 뭐냐?”

 

“아주 없다.”

 

“없는 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로 한다고 해서 되느냐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 말씀의 핵심이

여기에 있구나’라고 이해하고,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를 스스로 돌이켜서 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들었지만 견해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견해를 무너뜨려야 됩니다.

 

암자에서 두 사람이 공부를 하는데 조주 스님이 와서 “암주 있느냐?” 하니까 암주가 아무 말 안 하고 주먹을 내밀었습니다. 조주 스님이 “여기에는 물이 얕아서 배를 대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하고는 위 암자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도 “암주 있느냐?” 하니까 주먹을 내밀었습니다. “너는 능살능활이라. 능히 죽이고 능히 살리는구나. 물이 깊고 깊어서 배를 대고도 남는구나.”

 

둘 다 주먹을 내밀었는데 어째서 다를까요?

 

요즘 공부를 설해서 되지도 않은 사람이 와서 주먹 내밀고, 어떤 사람은 절하고, 소리 지르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별짓 다 하는 사람 많습니다.

 

선지식이라야 사람을 바로 보고 들어가 점검해서 바로 이끌어줄 수 있지, 선지식이 아니면 둘 다 주먹을 내미는데 그게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선지식이라야 똑같이 주먹을 내밀어도 이것은 진검이고 저것은 가검이라는 것을 안단 말입니다.

 

다 된 사람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다 되지만 그걸 누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토굴에 20년 30년 있다가 자기 혼자 조작으로 생각해서 거꾸로 알아도 알았다고 떡 하니 나와서는 도인인 체 하면,

 

저게 진짜 안 것인지 아닌지를 누가 바로 보고 판명을 해줘야 되는데, 그 판명을 받지 않고 혼자 생각을 지어가지고 알은 체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큰소리치고,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길게 기르고 도인인 체 합니다. 『금강경』 글귀나 꿰고, 책이나 들여다보고 아는 체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누가 알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확실한 안목이 있는 선지식 앞에는 마치 해가 뜨면 별 같은 것은 빛이 죽어서 없어지듯이 참으로 이 공부는 분명하게 되어야 됩니다. 이건 공부하라고 하는 말이지, 말재주나 배우고 써 먹으라고 해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돈오입도요문론」은 논리적으로 교리적으로 파헤쳐서 설해준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선에 대한 것도 교리적으로 밝게 파헤쳐 놓은 것이 많아서 『벽암록』도 그래서 불을 살랐습니다.

 

지금 것은 불사르고 남은 찌꺼기를 모아서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 다 나와 있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두면 전부 입도인이 되어서 도인인 척 합니다.

 

조주 스님 같은 이가 턱 하니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 하니 ‘그런 말은 여기에 없는데···’ 하고 생각 안 할 수 없지요. 조사어록이고 교리에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풀어놓은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곧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교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배운 것 가지고는 조주 스님의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 운문 스님의 변소 젓는 똥막대기라고 하는 것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됩니다.

 

덕산 스님 같은 이는 누가 오기만 하면 때리고, 뭐라고 입을 덜썩이기만 해도 때리니 덕산 스님 방 안에는 천하인이 가도 다 방망이를 맞습니다. 어느 누가 가도 다 때리니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또 ‘뜰 앞에 잣나무니라.’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거기에는 이런 소리를 해도 안 맞고 저런 소리를 해도 안 맞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척 하니 뒤집어져서 살림살이가 모조리 박살나서 없어져 버리고 천진바탕이 확연히 드러나서 다 되어버리면 그만 되는 것인데

 

이 말 들어서 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발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 들어서 해결되면 좋고 해결 안 되면 ‘아! 내가 이놈을 해결해야 되겠구나’ 하고 철저한 신심을 내어야 됩니다.

 

대주선사어록 강설(상) 중에서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로를 인정할 때  (0) 2019.12.08
증득하는 것은  (0) 2019.12.07
양변을 뛰어난 자  (0) 2019.12.05
본래 인연이 없는 것  (0) 2019.12.04
주객분별을 넘어선  (0) 2019.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