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가끔 책을 읽다 보면, 뜻을 알
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아야 책을 읽을
수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순서가 바뀐 것이다. 뜻
을 모르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단지 흰 종이 위의 검
은 글씨만 읽을 뿐이다. 검은 글씨만 읽으면 그나마 다
행이다.
문제는 내 생각을 통해 그 책을 읽는 것이다.
어찌보면 책을 통해 뜻을 아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통해 책의 뜻을 보는 것이다. 만일 내 생각이 왜곡되어
있다면, 게다가 그 견해가 책의 내용과 신통하게 맞아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책의 내용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오
해하고 있는 것이다. 조심하자.
유식무경(唯識無境),
말 그대로 ‘오직 식만 있고 대상은 없다’는 뜻이다. 여
기서 식(識)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心)과
같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는 말이나 ‘오직 식
만 있고 대상은 없다’는 말과 같은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기’ 때문에 ‘오직 식만 있고 대상은
없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제 하나하나 풀어 보자.
자기 생각을 통해 책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겠지만, 자
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살펴보자. 그 다음에 다시 자신
의 생각을 가지고 비교하여 검토하는 과정을 계속하
자. 이상하다 싶으면 계속 반문해 보자.
유식무경. 오직 식[마음]만 있고, 바깥 대상은 없다. 분
명히 대상을 보는 내가 여기 있고, 바로 앞에 저렇게
보이는 대상이 펼쳐져 있는데, 그것이 없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인(道人)들은 세상을 참으로
다르게 보나 보다.
세상이 있는데 왜 없다고 하지?
우선 ‘없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가 다르다. 똑같이 ‘있
다’라는 단어를 써도 그 의미가 다른 경우가 있다.
잠을 자면서 꾸는 꿈속에 컵이 ‘있다’는 것과 지금 내
앞에 컵이 ‘있다’는 것은, ‘있다’는 것은 같지만 묘사하
는 상태가 다르다. 현실의 입장에서 볼 때, 꿈속의 컵
은 ‘거짓으로 있는’ 것이고, 지금 내 앞의 컵은 ‘진짜로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직 식만 있고 (인식의) 대상이 없다’는
문장에서 ‘없다’는 표현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
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것은 도인(道人)이 되고자 함이지 광인
(狂人)이 되고자 함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 상식과 다르게 오직 (대상을 인식하
는 주체인) 식(識)만 있고 (인식의) 대상은 없다고 하
는가? 이 말을 인식의 측면에서 이해해 보자. 그러면
‘앞에 보이는 대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
다’고 풀어 쓸 수 있다. 즉 우리들은 ‘세상이 이렇게 저
렇게 있다’고 하지만, 실제의 세상은 우리가 본 것처럼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자연과학의 상식을 동원해 보자.
내 앞에 보이는 컵에는 빈틈이 없어서 물을 담아도 새
지 않는다. 물이 새지는 않지만, 빈틈은 정말 없을까?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컵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이다.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컵은 빈틈이 없다고 해야 하는
가,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하는가?
정답은 ‘그때그때 달라요’이다. 그때그때 다른데 한 순
간의 모습만을 컵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이다. 단지 그 순간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이상한 예를 든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앞의 주장을 살펴보자.
‘세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현재 상황에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것도 나
의 입장에서 말이다. 즉, 내가 그렇게 보았다고 해서,
내가 본 것이 틀림없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하나, 영화를 보면 빠른 속도로 영상이 움직인다.
사실 그런가? 아시다시피 영화 속 장면 각각은 멈춰 있
다. 다만 그 장면이 아주 빨리 바뀌어 우리 눈에 움직
이듯 보일 뿐,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 스크린의 영
상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텔레비전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점이 매우 빠르게 바뀌면서 우리는 화면 속 영
상이 움직인다고 느끼게 된다.
세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또 하나, 이번에는 소리이다. 밖에서 개가 짖는다. 우
리 귀에는 ‘멍멍’으로 들린다. 그런데 미국 사람에게는
‘바우와우’로 들린다. 똑같은 소리가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리는가? 우리는 개가 ‘멍멍’ 짖는다고 배웠고, 미국
사람들은 ‘바우와우’ 짖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말한다. “개의 품종에 따라 짖는 소리가 다
릅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거
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는 우스갯소리이다.
그럼 기차 소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기차가 “칙칙폭
폭” 소리를 낸다고 여기지만, 미국 사람들은 “추추” 소
리를 낸다고 여긴다. 같은 기차 소리인데 왜 다른가.
마찬가지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차
본래 소리는 어떠한가? 사실 알기 어렵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듣는 사람의 선입견이 함께 덧칠되기 때문
이다.
이제 조금 그럴듯하게 이해가 되는지. 아직도 이해가
힘들 수도 있다. 계속 고민해 보자.
‘유식무경, 오직 식만 있고 (바깥) 대상은 없다’에서
‘없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덧칠한다.
내 생각을 통해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 세상을 본다’
또는 ‘내가 인식한대로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성립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본 것이 그대로 있다고 여긴다.
무경(無境),
대상이 없다는 말은
‘내가 본 것을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그것’[境]은 실제로 없다[無]는 의미이다.
‘멍멍’으로 들렸던 그 개 짖는 소리가 실제 있는가? ‘칙
칙폭폭’이라는 그 기차 소리가 실제 있는가? 실제 있다
면 누구에게나 ‘멍멍’, ‘칙칙폭폭’으로 들려야 한다. 내
앞의 컵이 빈틈이 없는 물건인가? 그렇다면 언제나 그
렇게 보여야 하는데, 미세한 세상으로 들어가면 그렇
지 않다.
세상은 내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유식불교의 이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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