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인 거리감과 동일시
정서적인 거리감은 동일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주체로, 상대적으로
멀게 느껴지면 대상으로 여겨집니다.
즉, 이것과 저것을 나눠놓고 이것을 더 가깝게 느끼면
이것이 점차 ‘나’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시에 필수적인 것은 ‘나와 대상’이라는
내적인 분열이며, 그중 하나의 대상과 동일시가 일어
나는데 그것이 ‘나’라는 느낌입니다.
동일시할 대상이 없다면. 동일시는 일어나지 않습니
다. 분별된 무엇이 이미 생겨난 상태에서 동일시는 일
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분별에는 가깝고 먼 구별이 존재합니다. 그와 같
이 이 몸과 다른 몸을 나눠놓은 상태에서도, 가까운 이
몸을 ‘나’로 다른 몸을 ‘너‘로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좀 더 거시적으로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 미국 중 누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까?
거기에는 공간적 거리감도 작용하고 정서적 거리감도
작용할 것입니다. 그 미세한 느낌을 느껴보십시오.
이 몸을 나라고 느끼거나 저 몸을 너라고 느끼는 것은
바로 ‘나와 너’라는 분별을 기반으로 하며, 주의를 어
디에 더 많이 주어왔느냐에 따라 주체와 대상으로 나
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이 몸과 마음에 ‘나’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주의를 주어왔습니다. 그러기에 주의
가 자동적으로 많이 몰리는 이 몸을 주체로 여기며
‘나’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내적인 느낌을 통해 확인됩니다.
결국 우리가 세계와 나를 인식하고 느끼는 것은
가상의 내면세계를 통해서입니다.
내 안에 세계의 상이 만들어진 이후에 나와 세계라는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수많은 감지들이 감각기관을 통해 내면에 쌓인 후
그것들 간의 질서가 형성되고 그중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나로, 조금 멀게 느껴지는 것은 너로 이름붙이고
유용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일시를 이루는 에너지는 무엇일까?
그 강력한 힘은 믿음’이라는 에너지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생명력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가장 투명한 형태
인 순수주의가 뭉쳐있는 것이며, 그 뭉쳐진 힘이 과거
의 어떤 흔적을 향하여 자동적으로 몰려간다하여 자동
적 과거지향주의(自動的 過去指向注意)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과거지향 주의(注意)가 사용되어 ‘세
상’을 ‘인식’하는 순간, 거기엔 이미 ‘나’가 포함되어 있
습니다. TV 드라마 내용이 ‘와닿는 순간’ 이미 그 안의
누군가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언가가 ‘느껴지는’ 순간
이미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관성을 넘어가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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