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은
‘좋은 것’에 집착하고
‘싫은 것’에 저항하여
시계추처럼 그 양쪽을
끊임없이 왕복하므로
항상 불안정하다.
집착과 저항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그 왕복 운동의 진폭이 커져
더 큰 불안정에 휘둘린다.
이 불안정이 곧 고苦다.
그래서 생존하는 한 고일 수밖에 없다.
성자가 되기까지는,
어디에 집착하거나 무엇을 회피한다는 건
거기에 속박되었다는 뜻.
늘 불안하고 얽매이고 갈등한다.
그래서 고苦.
집착하지도 회피하지도 않는 게
안정.
인간의 삶은
‘기분 좋은 상태’를 추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허나 중생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어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괴로움은 끝이 없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고고苦苦라 하고,
5온에 집착하여 불안과 긴장과 두려움이 일어나는 괴로움을
행고行苦라 하고,
바람이 무너짐으로써 받는 괴로움을
괴고壞苦라 한다.
온 천지가 ‘마음’이라고 자각하면
생사生死가 없어진다.
마음이 육신 안에 있다고 착각해서
육신 밖의 산하·허공·대지가 모두 묘하고
참된 마음 가운데 있는 줄 알지 못한다.
- 『능엄경』 제2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게
중도中道다.
좋아하거나 사랑하면 집착이 일어나고,
싫어하거나 미워하면 분노가 일어난다.
2분의 감정이 붕괴해 버려
집착할 것도 분노할 것도 없는 게
해탈이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이 생각도 버리고 저 생각도 버리면
평온에 이른다.
유有는 무無에 의해 세워지고,
무는 유에 의해 드러난다.
본디 유를 세우지 않으면 무도 있지 않으니,
이미 무가 있지 않은데
어디서 유를 얻을 수 있겠는가.
유와 무가 서로 의지해 있으니,
이미 서로 의지해 있으면 다 생멸이다.
다만 이 두 소견을 떠나면
바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보게 된다.
- 『돈오입도요문론』
분별이 사라져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고,
생각을 내려놓고 저항하지 않아 그저 편한 것,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고,
몸-마음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 나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잊은 채 그저 편한 것,
안심安心.
지나치게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상태,
이게 괴로움의 원인이다.
적당한 게 편안함이다.
어떤 말이든지 어떤 인연이든지
저항하지 않고 편안히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상태,
이것이 비운 마음이다.
불안은
불확실한 미래를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막연하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의 혼란.
허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미래는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다.
마음이
진흙으로 소 두 마리(2분법의 생각)를 만들어
온갖 분별을 일삼다가 바다로 뛰어드니,
두 마리 진흙소가 녹아 버렸다.
2분법이 용해되어 버리니 유무有無가 사라졌다.
적멸寂滅이다.
적멸,
그것은 온갖 분별의 소멸이고,
에고의 소멸이고,
과거와 미래의 소멸이고,
상상과 허상의 소멸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떠도는 영상이다.
그 허망한 영상이 소멸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백지白紙다.
그 백지가
‘하나’이고 ‘무無’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하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이 저절로 끊어져
과거의 일이 없다고 하고,
미래의 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원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면
‘미래의 마음’이 저절로 끊어져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하고,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이니 온갖 일에 집착할 게 없는 줄 알 뿐이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으면
‘현재의 마음’이 저절로 끊어져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거두어들이지 않으니,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다고 한다.
- 『돈오입도요문론』
과거의 마음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과거를 버린 것이고,
현재의 마음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현재를 버린 것이고,
미래의 마음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것은 3세世를 다 버린 것이다.
- 『전심법요』
‘마음을 찾으라’고 한다.
허나 그럴 거 없다.
마음은 지각 대상이 아니니까.
나한羅漢이 법안法眼에게 물었다.
“일체가 오직 마음이라 하는데, 저 뜰아래에 있는 돌은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가?”
“마음 안에 있습니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왜 무거운 돌을 가지고 다니는가?”
- 『금릉청량원문익선사어록』
중생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아
어떤 때는 아귀나 아수라가 들끓고,
어떤 때는 관음이나 아미타불이 움직이고,
어떤 때는 지옥과 극락을 오가니,
중생은 죽어서 윤회하는 게 아니라 살아서 윤회한다.
부처를 밖에서 찾는 이에게는
‘마음이 곧 부처다 卽心是佛’,
여기에 집착하는 이에게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非心非佛’,
마음과 부처를 말할 필요가 없는 이에게는
‘그 무엇도 아니다 不是物’.
도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마라.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나고 죽는 마음을 일으켜 꾸며 대고 취향을
갖는 것은 모두 오염이다.
곧바로 말하면 평상심이 도 平常心是道
평상심이란
꾸밈도 없고, 옳음과 그름도 없고, 취함과 버림도 없고, 연속과 단절도 없고, 속됨과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행위가 다 도이다.
- 『전등록』 제28권, 「마조도일장」
불법佛法에는 인위적인 꾸밈이 없다.
오직 애써 꾸며 대지 않는 평상시의 생활일 뿐이다.
변소에 가고,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자는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 『임제록』
너희들 각자의 마음이 부처임을 확신하라.
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
달마 대사께서 인도에서 중국에 오셔서
최상의 가르침인 일심一心을 전하여
너희들을 깨닫게 하셨고,
또 『능가경』의 경문을 인용해서
중생의 마음 바탕을 보이신 것은
너희들이 뒤바뀌어 스스로를 믿지 않을까 봐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 『전등록』 제6권, 「마조도일장」
너희들이 문자를 따져서 이해하려 애쓰고,
문자로 천차만별의 분별을 일으켜
끝없는 의문과 논란을 벌인다면,
거기서 얻는 것은 말장난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
- 『전등록』 제19권, 「운문문언장」
어리석은 자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듯이
문자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자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 『대승입능가경』 제5권
지붕에 오르려면 사다리가 필요하고
개울을 건너려면 징검다리를 디뎌야 하지만,
사다리와 징검다리에 집착해서
그것을 이리저리 궁리하느라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개울에 빠지지는 않을까,
선사禪師들은 늘 그것을 염려했다.
존재하는 것은
다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이고 ‘무無’다.
이름이 곧 경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름이 있으면 허망하고,
이름이 없으면 영원하다.
3백6십 뼈마디와 8만4천 털구멍을 총동원해서
온몸이 한 개의 의심 덩어리가 되어,
오직 이 ‘무無’만 참구하라.
밤낮으로 끊임없이 참구하라.
이 ‘무’를 허무虛無의 무로 이해해도 안 되고,
유무有無의 무로 이해해도 안 된다.
이 ‘무’의 참구는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고서 토해 내려 해도 토해 낼 수 없는 것처럼 절박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쓸데없는 앎과 잘못된 깨달음을 다 탕진하고,
오래오래 참구해서 수행이 깊어지면 저절로
‘나’와 ‘무’가 하나로 된다.
이 경지는 벙어리가 꿈꾼 것 같아
오직 자신만 알 뿐 남에게 전할 수 없다. (…)
자, 그러면 어떻게 참구해야 하는가?
온 기력을 다해 오직 ‘무’가 되라.
그것이 지속되어 끊어지지 않으면
심지에 살짝 불만 대도 바로 불이 붙듯
광명이 찾아온다.
『무문관無門關』 「조주구자趙州狗子」
-인생과 싸우지않는 지혜중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