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들은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과 같은
경험의 내용물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모든 지식과 경험에 대한
알아차림을
잊어버리고는 합니다.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의 배경에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변치 않는 알아차림의 단순한 경험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림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스스로가 알아차림의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적인 모습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대신
생각, 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들이
모인 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알아차림의 경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지요.
그래서
대상적 경험이 지니는 특성과 한계가
마치 우리 자신의 특성과 한계인 것처럼
혼동하고 있습니다.
스크린이 영화 속 사물들의 특성과
뒤섞인 나머지,
스크린 그 자체가
어떤 풍경이 되어버린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마치
이처럼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이
대상적 경험과 뒤섞여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순수하고도 영원한 알아차림이
이제는 일시적이고도 제한된
알아차림이 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한정적인 마음, 개별적 자아인 ‘에고ego’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알아차림이
몸의 한계, 몸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몸의 속성과 한계와 혼합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별적 자아인
에고separate self or ego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개별적 자아가
곧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지요.
참되고 유일한 “나self”는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입니다.
이를 잊어버렸을 때
필연적으로 개별적 자아가 나타납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신의 무한한 존재를
망각한 결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이라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결코 대상적 경험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대상적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거나 마비시킬 때라도
영원함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신에 대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지요.
* * *
앞서 “우리는
스스로가 알아차림의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다고
‘우리’와
‘알아차림의 존재’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표현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나는 알아차린다”라고 할 때의 “나”와
“나는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할 때의 “나”는
동일한 존재입니다.
알려진known 나와
아는knows 나는
동일한 존재입니다.
빛을 발하는 태양과
빛으로 밝혀진 태양은
동일한 존재이듯이 말이지요.
“알아차림awareness”만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기being aware”만이
알아차리기를 알아차립니다.
따라서
알아차리기라는 경험과
알아차림의 존재를 간과하는
“우리we”란
분명 스스로를 간과하거나
망각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스크린 위에서는
경험이라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그로부터 ‘알아차리는 나’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대상적 경험과
너무나 밀접하게 엮여 있기에,
자신의 본 모습을 잊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현존을 망각해 버립니다.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내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영상으로 스크린을
완전히 덮어버릴 수는 없듯이,
알아차림 자체가
경험에 의해
완전히 가려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스크린을 볼 수 있듯이,
알아차림은
모든 경험들 내내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영화 속의 풍경을 볼지
아니면 스크린을 볼지 여부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지요.
처음에 우리는
영화 속의 풍경을 보게 되고,
그러고 나서야
스크린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그 다음에
스크린을 풍경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 우리는
다양한 사물들을 보게 되고,
그러고 나서야 알아차림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고,
그 다음에 알아차림을
대상적 경험의 총합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곧
수피즘Sufism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신의 얼굴이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또한 바로 이런 의미로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는
“ 세상은 비현실이며
오직 브라만Brahman만이 현실이다.
브라만이 곧 세상이다 ”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은 더 이상
알아차림을 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알아차림과 함께 빛나게 됩니다.
알려진 것the known은
앎과 함께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간과하게 되고
그 결과 평온함과 만족감을 잃고 맙니다.
경험에 대한 알아차림이라는
스스로의 작용 때문에
알아차림은 스스로를 가려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알아차림은
대상적 경험 속에서 사라지고 말지요.
마치 영화 속 드라마에 집중하다보면
스크린의 존재가
잠시 가려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수피즘의 신비주의자 발리아니Balyani는
“ 신은
자신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려버린다 ”
라고 했던 것입니다.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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