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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내면의 고요한 공간을 신뢰하라.


‘붓다’란
모든 형상을 일으키고,
모든 형상이고,
형상이 변해도
남아 있는 것을 가리킨다.

본질이고
실재이며
여여如如함이다.


나는 현란하지 않고 통상적인 말을 사용하고자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른다.

생명은
모든 형상을 초월한다.


주위를 둘러보고 내면을 바라보고 모든 곳을 살펴보면서 (불교에서 하는 말로) 나의 불성佛性을 추구했는데,

갑자기
“내가 불성이다. 나의 모든 것이 불성이다.”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이 불성이고,
모든 존재가 불성이며,
존재의 없음도 불성이다.

이는 대단히 자유롭게
얽매임에서 풀어주는 발견이다!

그것을 알고,
매일매일 잊지않고 살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이
근본적인 종말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 후에도
생명은 늘지 않고 줄지 않으며,
우리도 늘거나 줄지 않는다.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는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사람들이 슬퍼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어째서 당신들은
   이 몸에 그리 집착하는가?
   내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나는 여기에 있다. ”

그는 이미 보편과 동일시했던 것이다.
혹은 그의 말대로 진아self만이 있다.
내가 사용하는 ‘생명’이라는 말은
마하리쉬가 사용한 ‘진아’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모든 곳이 이미 진아·생명이다.

진아가 소위
라마나 마하리쉬라는 형상을
취하기를 중단했다고 해도
진아는 존재하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진아는
어디에나 모든 것 안에
여전히 완전히 현존하기 때문이다.

라마나의 형상은
변했고
죽었고
사라졌지만,
진아는 어디에나 있다.

진아는
그의 형상의 온전성,
즉 생물학·화학에 직접 연관되는 것과
더불어 생물학·화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에 더 많이 있고,
샌프란시스코 중부,
피츠버그,
암스테르담, 파리,
녹색 산의 꼭대기, 아름다운 불교 사원,
수세기 동안 숭배 받았던 교회에는
더 적게 있지 않다.


사물의 실재를 알게 되면,
진정한 형상인 것과
진정한 형상이 아닌 것에 대한
말다툼을 하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태어날 때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니고,
죽을 때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게 아니다.

오직 우리의 형상,
생명이 취한 형상만이
태어날 때 존재하게 되고
죽을 때 존재하지 않게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날 때,
우리가 깨달을 때,
본질적인 의미에서
태어남도 죽음도 없음을 알게 된다.

형상은 변하지만
우리의 존재는 시작도 끝도 없다.

선불교에서
영적 수행을 하며 노력하는
진정한 이유가
태어남 · 삶 · 죽음의
‘중대한 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나는
태어남·삶·죽음의 ‘중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걸 약속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얻어도
우리는 삶과 살기, 태어남과 죽음의
어려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해답이란
우리가 어떤 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오해하지 않으면
그 죽음이
다르게 여겨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고인이 취했던 형상은 사라졌고,
그 형상을 사랑했던 우리가
가슴에 소중히 품었지만
— 그 형상을 취했던 진아, 불성, 생명을
    그리워하듯이 —


삶은 늘지도 줄지도 않고,
불성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그리스도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태어남과 삶과 죽음을
완전히 다르게 경험하는 길이 있다.
이는
태어남과 삶과 죽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우리의 형상은 있지 않게 될 것이지만,
우리라는 실재는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탐구를 권하고 싶다.


여러분은 내가 가르치는 것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그건 여러분의 권리이므로—어떻게 하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가르침을 믿는 것은 그것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을 믿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 것도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받아들임과 거부하기,
믿기와 믿지 않기의 차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는 추상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영적 스승들이—적어도 내가—사람들이 꿈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믿든 안 믿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심오하고 진정한 호기심을 가지고, 관념과 개념으로(그것들이 유용할 수도 있지만) 만들어진 세계를 넘어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추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상태에서
깨어나겠다는 의도를 가지라고
여러분에게 권한다.

추상적인 삶이란
마음이 좋다고 말하는 걸 좋아하고
마음이 싫다고 말하는 걸 싫어하며,
조건화된 마음이
찬성한다고 말하는 것에 찬성하고
조건화된 마음이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하며,
백일몽 속에서
끝없이 맴도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백일몽 속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영적 충동이 일어날 때가 많다.

깨달음이나 깨어남이나
신을 향한 진정한 본능은
일종의 불만족에서 비롯된다.

더 이상 추상적인 삶을 살지 않으려 하고,
더 이상 슬픔의 세계에 끊임없이 기여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 하고,
자기가 믿는 것을 경험하는 대신
풍부하고 깊은 존재를 경험하려는 소망에 주목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충동이다.

그것을 시작하는 법, 조건화된 세계와 상상된 에고의 자아 밑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본성에 이르는 법에 대해 유용한 단서를 내가 제공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붓다이고,
붓다만 있고,
진아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길이 닿는 어디에나 있다.
예수라는 사람,
그리스도가 취한 형상은
태어났고 살았고 죽었지만,

예수가
철저히 살았던 그리스도,
골수에 사무치도록 철저히 살았던
그리스도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만일 신이 바로 지금,
바로 여기가 아닌
외부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한다면,
부르짖으며 필사적으로
불안 속에서 신을 찾게 된다.

이와 달리,

호기심으로 신을 찾아보라.
경이감과 경외감을 회복하고,
내면의 고요한 자리로 들어가고,
관념적인 마음의 아래로 내려가라.
내면의 고요한 공간을 신뢰하라.
바로 그곳이
궁극적인 존재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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