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일의식은
언제나 현존한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의 ‘본증’,
즉 ‘본래의 깨달음’이다.
‘본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먼 옛날에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근원이자 기반이기 때문에,
현재 형상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묘수妙修,
즉 영적 수행이란
바로 이 근원의 움직임, 활동이며,
그것은 본래의 깨달음의 마땅한 기능이다.
따라서 본증묘수는,
진정한 영적 수행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임을 뜻한다.
수행이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수행은 처음부터,
사실상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스즈키 순류鈴木俊隆 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면,
사실 깨달음을 얻을 길은 없다.
깨달음이란
좋은 기분과 같은
특정한 마음상태가 아니다.
[좌선 수행시] 그대가 앉을 때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
좌선에 있어서는
바른 마음 상태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바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기도 속에서는
그대가 하나님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비사상의 가르침과 이 말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대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
그대가 나를 찾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그대가 나를 찾았다는 뜻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수행은
그 자체가 이미 목적지다.
결과와 수단,
길과 목적지,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이다.
- 무경계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