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럽게 돌아가는 냉장고가 있는 방에 계속 앉아 있다 보면 그 소리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그 소리가 그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곳이 시끄러웠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소리가 그치기 전에는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요, 아닐까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그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반대로 들었다면, 들었는데 왜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소리가 그칠 때 그 그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치기 전에도 이미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다만 듣기는 듣는데,
그 들음을 의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듣기는 듣는데,
듣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자기지인 본각이 있는데, 우리는 그 본각이 있음을 쉽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지인 본각을 알아차리는 수행, 즉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견성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본각 내지 본성을 깨닫는 견성은
본성에 대한 반성적 사유나
개념적 분석과는 다릅니다.
자기지의 깨달음은 대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기지의 마음자리로 들어섬으로써, 즉 계합契合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지 내지 본각을 깨닫겠다고 자기 마음을
본각을 깨닫겠다고 자기 마음을 대상화해서 인식하려고 하면,
오히려 자기지는 가려지고 대상지만 부각되지요. 지눌은 그러한 대상화의 오류를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눈이 세계를 보는데 눈 자신은 보지 못한다고,
자기 눈을 빼어서 보려고 하면 어리석지 않겠는가.
눈은 그런 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수심결》
눈은 대상화해서 바라봄으로써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눈의 활동을 스스로 자각함으로써 아는 것입니다.
눈의 본래 자리,
마음의 본래 자리에서
성성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눈 자체의 활동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지요.
- 마음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