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나는 이 나무를 흔들 거야”
라고 말하지 않아요.
마찬가지로
‘나는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해’라는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도
그냥 생기는 거예요.
그러나
‘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아직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 단 한 가지 실수가 다른 백 가지의
실수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 바로 말이죠.
무엇이 이를 방해하는 걸까요?
낡은 사고방식과 습관,
그리고 과거의 나로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급진적일지도 모를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큰 모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라고 느껴질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이 생각은 우리 안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이 많은 한편,
정작 본인의 힘은
별로 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마치 갈증이 무척 나서
물을 동이째 들이켜고 싶은데도
손에 티스푼 하나 달랑 들고
샘터에 오는 격이지요.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제가 이미 참자아라고 얘기하는 건가요?”
그럼 저는 이렇게 답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제 마음이 허튼 생각과 아우성으로
꽉 차 있는데 어떻게 제가
참자아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아우성치게 내버려두세요.”
“하지만 분명 붓다는 아우성치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거예요.”
“붓다가 아우성치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를 그냥 무시했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생각을 무시한다는 말이
어떤 생각을 멈추거나
억누르려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냥 그 생각으로부터 돌아서세요.
혹 어떤 생각들은 우리가 어디로
돌아서든지 계속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정기회원권이라도
끊은 것처럼 줄곧 나타나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요.
그럴 때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지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냥 지켜보세요.
이 시점에서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기계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켜본다’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또다시 같은 상황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지켜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켜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보고 경험하든
그것이 단지
일시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분명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지켜보는 대상은
우리 자신일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난 파도처럼 사납게 날뛰는 것을
보고 있는 그 순간,
그 감정은 정말 진짜인 듯 보입니다.
특히나
그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그 상태가 마치 혈관 속에 흐르는 피나
폐 속에 들어찬 공기처럼
나 자신과 한 몸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지요.
그런데도 이런 느낌은 그것이 진짜라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에고-
정체성은 수그러들 것이고,
날뛰던 마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온전한 관찰자의 자리를 지키세요.
-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