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진리를 탐구할 때
모든 것의 진리와 마주치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관념적 마음에서는
그것이 신비로운 통찰 같은데, 때로는 정말 그렇다.
진리가 하나의 계시로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과 관념적 마음으로
상호연결성이 생생한 사실임을 파악한다면,
그것 또한 정도는 덜할지라도 진리이다.
그것은 영리한 생각이 아니고,
영적 생각이 아니고,
영적인 것도 아닌, 존재의 실상이다.
환경 없이는 나무 같은 것이 없는 것처럼,
다른 존재들이 없는 인간은 없다.
우리의 몸에 대한 추상적인 정의에는 지구, 하늘, 바람, 비, 산소가 포함되지 않지만, 그중 하나라도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태양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못하고, 산소가 단 몇 분이라도 없으면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단지 우리에게 산소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바로 산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관념적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이 나머지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 위의 모든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지구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나타내므로, 인간이 바로 지구이다. 더 나아가 은하가 없다면 지구도 없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개념과 정의가 어떻게 상호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경험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상호연결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상호연결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물들은 상호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물들은 서로 하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깊은 단계의 이해지만,
여전히 통일성에 대해서는 표면적인 이해이다.
그 진리는 잘 보이므로 비범한 지성이 없어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살기 때문에,
관념이 나눌 수 없는 것을 조각으로 나눈다는 것을 잊었고,
관념은 사물을 실제로 직접 인식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었고,
우리가 관념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사물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하기를 중단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는 깨달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즉 깨달음이란
관념이나 개념의 렌즈를 통해 보지 않고
직접 인식하는 능력이다.
깨어남이란
마침내 관념적 이해를 거치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며,
관념적 세계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관념적 세계로부터 깨어난다고 해서 언어를 잃어버리거나 관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다. 단지 관념적 이해를 통해 규정되는 상태와는 다른 존재 상태와 의식 상태에서 살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영적 탐구의 목적이다.
즉 “나는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같은 개념과 질문을 사용해서, 하나의 관념이든 여러 가지 관념이든 거기서는 자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
그래서
존재의 진리는
어떤 관념으로도 규정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을 알게 될 때,
꿈에서 깨는 것 같은 깨우침을 얻을 것이다.
정말로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꿈을 꾸듯 모든 걸 관념적 마음으로 인식하며 사는
상태로부터 깨어난 것이다.
관념적 마음은 이야기꾼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일 뿐,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 인식이나
직접적 경험 속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념과 개념의 성질, 언어의 구조, 그리고 언어가 우리 마음과 삶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데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알기 전에는,
우리가 아는 관념과 개념을 통해
삶을 인식하고 경험할 뿐이고,
깨우치거나 관념과 개념을 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들의 실재를 인식할 가망이 거의 없다.
하지만 깨어난다고 해도
우리에게서 관념이 없어지지는 않으며, 창조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으로 관념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
더 이상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게 될 뿐이다.
영적 가르침은 이렇게 우리를 미지未知로 안내한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곳은 자기 자신이다.
어떤 관념이나 개념 없이,
이야기나 기억, 설명도 없이,
이 순간과 자기 자신을 인식하라.
그렇게 하면 왜곡을 모두 멈출 수 있고,
그에 따라 기억과 관념과 개념으로 규정되었던
‘나’도 중지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명상을 하면 겁을 먹는데, 왜냐하면 ‘자아’는 그들이 이제까지 알았던 유일한 자기이고, 그들은 존재하는 유일한 자기가 자아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아가 상상일 뿐이라면, 우리가 상상하기를 멈추면 그 자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든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다. 다만 더 이상 마음, 관념, 개념을 통해 규정되거나 경험되지 않는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작업이라는 어려운 일은 마음, 관념, 개념, 기억, 믿음, 의견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전부 생각으로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생각이 있든 없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 실재는
그것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 자신이든 세계든 다른 사람들이든 신이든, 이런 것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개념일 뿐, 실제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의 생각에도 기대지 않을 때, 그런 것들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인가? 이웃은 무엇이고, 친구는 무엇이고, 세계는 무엇이고, 존재는 무엇인가? 이를 보완하는 생각을 계속 찾는다면 혼란스러워지겠지만,
반대로
생각을 놓아버리면 (잠시라도)
모든 것이 미지인 자리에 있게 된다.
더 이상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고,
친구가 누구인지, 이웃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세계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마음이 그런 것들을
관념적인 표상으로 나타내기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관념적인 표상 이상인 것,
진정한 것에 도달한 것이다.
진정한 것은 그것에 대한 표상에서 찾을 수 없고,
생각 이전에 즉각
‘직접’ 찾아야 한다.
그러면
생각이 본래대로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원하는 만큼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책에 있는 말들 하나하나는
말이 아닌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나무’라는 생각이 나무를 나타내고
‘사람’이라는 생각이 인간을 나타내듯이
어떤 생각은 사물을 나타낸다.
하지만 한 그루 나무는
‘나무라는 생각’이 아닌 것처럼
한 인간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니다.
마음을 ‘일시정지’하면,
생각이 유용할 수 있고 심지어 창조적일 때도 있지만,
어떤 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존재와 우리의 있음을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여기서 깨어남이 일어날 수 있다.
깨어났을 때도
자신이 깨어났다는 생각을 믿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난 후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깨어났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건 모두 진실이야.”
이건 정말 우스운 말이다. 어떤 말은 다른 말보다 실재를 더 정확히 나타낼 수 있고, 모든 생각이 허위인 건 아니다. 어떤 생각은 진실에 더 가깝고, 다른 생각은 진실에서 더 멀고, 어떤 생각은 진실과 전혀 관계없고, 또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계속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실제 세계가 아니라 실제를 표상하는 세계—에서 살지 않도록 거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비범하게 느껴지고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 나에게 지난 역사가 있을 수 있고,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어떤 것에 대한 표상을 볼 수 있고,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생각들은 내가 아니다. 그것들은 나를 규정할 수 없다. 그것들은 어떤 실재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클 수 없다.”
물에 대해 아무리 정교하게 이해해도
물이라는 생각만으로는
갈증을 풀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생각은 생각이 나타내는 실제 그것이 아니다.”
이 말을 철저히 가슴에 새기고,
철저히 골수에 새기고,
온몸을 흐르는 혈액에 녹게 하라.
“생각은 실제 그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실제를 모른다’는 중간 단계를 받아들이면,
미지로 들어갈 때
미지는 어떤 장소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미지는 미지의 개념 아래 있는 생생한 실체이다. 요점은 모든 것에 대해 “나는 모른다.”고 말하며 평생을 살라는 게 아니다. 앎에서 벗어나 직접 인식하라는 것이다.
모름의 살아 있는 실재로 들어가서
직접 인식하면,
우리는 앎에서 벗어나고 개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실재에 이르고,
모든 것의 실재와 모든 사람의 실재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말이 유용한 도구지만
우리가 더 이상 말에 얽매이지는 않는 곳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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