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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의식 자체가 자신을 인식한다.

의식 자체가 자신을 인식한다.

 

‘무無’는 우리가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면서, 

바로 우리가 그것을 규정한 방식이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뒤덮인 것을 벗겨내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보는 수단으로, 

본래부터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명상을 하려고 의식 깊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명백한 의식에 현존하여 머물 수만 있으면 된다. 

 

어려운 문제는 그 단순한 것 하나를 하면서 머무르는 것이다. 복잡한 것을 하는 것보다 진정 일관된 단순한 것 하나에 머무르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복잡함은 우리를 끝없이 즐겁게 해주고 마음에게 할 일을 제공해주지만, 의식 자체와 직접 접촉하는 것은 붙잡을 것이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단순함이다. 

 

의식은 알아차림처럼 붙잡을 수 없고 잃을 수도 없다. 산만해지고 다음에 일어나는 생각이나 느낌에 집착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 집착도 의식 안에서 일어나므로 우리는 결코 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

 

수행하며 애쓰는 사람들은 의식으로 들어가려 하거나 의식을 찾으려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는 의식을 잃을 수 없다. 물론 의식에 ‘대한’ 의식은 잃을 수 있다. 즉 자신이 의식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걸 숙고하지 못한 채, 혹은 의식이 얼마나 비범하고 신비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의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음을 놓칠 수 있는 까닭은, 의식이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의식 자체는 두드러지지 않으며, 두드러지는 건 다른 모든 것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의식의 본성을 명상할 때면 

의식의 무대에 빛을 비추고 

의식이 직접 자신을 인식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이때 의식이 그 내용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건 잘못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잘 되지 않고, 느끼지 않으려 하면 부정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을 모두 버리고 다시는 아무것도 느끼지 말라고 권유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생각과 느낌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과 자기 지시적인 감정을 모두 초월하는 것을 그저 알아차려라. 우리는 그것들보다 먼저 있으며 의식으로서 남아 있지만, 그것들은 사라질 수 있고 또한 사라진다. 

 

그것을 직접 알아차리면 

인식의 빛을 비추는 자리가 마련된다. 

 

거기서 마음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자신을 인식한다. 

 

마치 의식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 나는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고, 

 감정 속에서 헤맸다. 과거 속에서 갈팡질팡했고, 

 미래에 대한 생각과 나라고 여긴 것 속에서 헤맸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내가 누구인지 밝혀주지 못한다.” 




얼마나 대단한 계시인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자유를 깨달은 것인가.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황홀한 의식 상태에 있을 필요는 없다. 보통의 의식이면 충분하다. 경험의 맥락이 경험의 내용보다 오래 간다는 걸 알기에 보통의 경험이면 더없이 적합하다. 의식의 내용은 오고가지만, 맥락은 항상 여기 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것이 내가 명상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 즉 어떤 것을 바라보기이다. 바로 그것이 명상이고, 탐구이고, 이제까지 알았던 것과 다르게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짐작도 못했던 방식으로, 우리와 동떨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소위 ‘남들’과 세계를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주관적인 의식감과 주관적인 자아감에 대해 명상하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통찰을 얻기 쉽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험의 내용을 바꾸는 데 집착하는 영적 수행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옳은 경험과 옳은 내용을 찾고 있다가 마침내 깨어나서 영적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측면이 맥락[의식의 내용이 아니라-옮긴이]이라는 걸 깨닫고는 깜짝 놀란다.

 

그 깨달음 덕분에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기반에서 행동하고, 

관계 맺고, 세계에 기여하게 된다. 

깨어남은 자기중심적인 행위가 아니며, 

바르게 수행하면 

결국 우리를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바라건대 깨어남은 우리가 세계 안에서 

기쁘고 자비롭게 현존하도록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감에 말을 건다. 

우리가 세계 안에서 

자비롭고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현존일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혁명적인 어떤 것을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존재하기’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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