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는 것도 인연에 의해 생기지만 사라지는 것도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 ‘돌아갔다.’ 또는 ‘돌아가셨다.’라고 표현하는데 그 말은 바로 근원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질적으로는 지(地), 수(水),화(火), 풍(風)으로 돌아갔다는 표현 일 것입니다. 지수화풍의 인연으로 만나서 지수화풍의 인연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물질계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세계는 온전한 하나로 형성 되었을까? 머릿속의 생각들을 찬찬히 바라보면 물질계보다 더 복잡한 인연들로 얽혀져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도 옆의 친구가 말을 걸면, 그 인연에 대답해야하고,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면 그 생각으로 인연이 닿고, 그러다가 또 금새 다른 생각하고, 또 다른 생각하고…… 찰나, 찰나, 인연, 인연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머릿속은 오히려 물질계보다 단 몇 초도 가만있지 못합니다.
이렇게 꽃 한 송이, 쌀 한 톨, 몸, 정신, 행동, 생각, 등등 심지어 티끌하나에도 서로서로 얽히어서 존재할 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실체란, ‘생멸의 변화하는 배후에 있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알아보았듯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도 없고
또 홀로 자기 혼자서 존재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있기에 밥이 존재하고
인간이 없으면 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으로 밥이 있기에 인간이 존재하고
밥이 없으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그때그때 연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모든 존재의 실체는 찰나 찰나의 연기에 의해 폭포처럼 흘러가는데 그것이 참 자아이며 실상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잊고 지냅니다.
밥 한 그릇, 옷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우주법계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존재는 연기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나’는 그들과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괴로운 이유입니다. ‘육체를 가진 나’는 이 우주법계와 동떨어진 소외된 독립체라고 생각하기에 자연을 함부로 하고 우리들의 인연들을 철저히 타자화해서 그들과 대립하여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누르기 위해 경쟁하고, 싸움하고, 심지어 살인과 전쟁을 감수합니다. 그것들과 사실은 하나인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우며, 외롭습니다. 죽음이란 것도 사실은 원래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이 아닌데 그 사실을 모르기에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은 규정할 수 없는 무수한 미립자의 투쟁이 아닐까? 실제로는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통일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히 복잡한 세계, 조그마한 하나의 천체이며 모든 형식, 모든 층계, 모든 상태, 모든 전승,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 혼돈이다.”
모든 존재의 실체는 무상(無相)으로,
찰나찰나 연기에 의해서 흘러가는 것으로
결코 머물 수 없는 무주(無住)로 ,
따라서 나온 바 없는 무생(無生)으로,
무성(無性)으로 그리하여 전혀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는 말 부터도 틀린,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을 보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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