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마당에 꽃들이 활짝 피었습니다. 꽃들은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아름다움과 탄생에 신비로운 생각마저 듭니다. 빨갛고, 노랗고, 순백의 하얀 색색의 모습과 향기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왔을까하는…… 그 근원에 대한 경이에 한바탕 감탄사가 터집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그 아름다운 꽃들을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에 하나의 ‘몸짓’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몸짓’의 정체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표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물론 김춘수 시인이 불교적 관점에서 일부러 그런 표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근원이나 본질에 대한 사고가 있었기에 이런 시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그 시를 그냥 불교적 입장으로 해석한다면, 그 ‘몸짓’의 정체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말함이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숭산 스님이 만약 이 ‘몸짓’을 언어로 표현 했다면 아마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이 ‘오직 모를 뿐’은
‘안다’ ‘모른다’를 떠난 언어 이전의 자리입니다.
또한 조주선사에게 ‘이 몸짓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면 ‘무(無)’라고 답변하셨을 것입니다.
이 ‘무’는 ‘있다’, ‘없다’를 떠난 자리입니다.
임제 선사께 물어 보았다면 ‘할’이라고 고함을 치셨을 것이고, 덕산 스님는 방망이로 30방을, 황벽선사는 나의 뺨을 후려 갈겼을 것입니다. 즉 김춘수 시인의 ‘몸짓’을 굳이 불교적 용어로 정리하면 여여, 여래, 진여, 본성, 안심입명처, 본래면목, 중도, 부모 미생전의 몸 등으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과점에 들어가면 맛있는 빵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양도 각각이고 맛도 다릅니다. 하지만 그 빵의 본질은 밀가루입니다. 밀가루 없는 빵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각각의 꽃들도 아름답고 향기도 다르지만 꽃의 본 바탕은 지수화풍(地水火風)입니다. 흙과 물과 햇빛과 공기가 만나 꽃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더 깊이 들어가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본질은 공(空)입니다.
순일한 허공성이 본질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우주의 본질은 공(空)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등등
그 모든 것들이 즉 오온(五蘊)이 공(空) 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입니다.
그렇지만 이 공에서 그 모든 것이 나왔기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도 합니다. 오온이 공하므로, 공은 다시 오온이 된 것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둘이 아닌 세계는 처처가 불성이며 처처가 부처님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등의 세계입니다. 밀가루로 만든 빵들의 본 바탕이 밀가루이듯이 이 세상 물질의 세계의 본 바탕은 공(空)입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저 세계들이
사실은 허깨비 같은 공(空)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도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공(空)이고, 아름다운 경치도 공(空)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공(空)입니다. 잘 생겼던, 못 생겼던, 지위가 높던, 낮던 똑 같은 공입니다. 저 하얗고 순결한 백합도 아무것도 없는 공(空)입니다.
결국 모든 꽃들은 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없는 것들을 내 마음만이 예쁘다고, 좋다고, 사랑한다고 분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면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죽네 사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조선사가 백장스님과 더불어 들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큰 호숫가에서 들오리들이 인기척 소리에 푸두득 날아가는 것을 보던 마조선사가 백장스님께 물으셨습니다.
“저기 날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백장스님이 말했습니다.
“들오리 떼 입니다.”
“어디에 있는가?”
“산 너머로 날아갔습니다.”
마조스님이 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백장스님의 코를 잡고 세게 비틀어 버렸습니다.
“어찌 일찍이 날아갔으리오.”
마조선사가 물은 것은 들오리가 아닙니다.
그는 본질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라지는 것은 현재 우리의 업식에 의해서 보이는 삶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애초에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사라지는 것이지만
본질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흘러가는 시간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생각’이란 (0) | 2020.08.01 |
---|---|
마음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0) | 2020.07.31 |
완전한 깨달음 (0) | 2020.07.29 |
그저 바라보는 연습 (0) | 2020.07.28 |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알고 있어요. (0) | 2020.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