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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그 무엇도 실체는 없다

窮坐實際中道床

궁극에는 실제實際의 중도상中道床에 앉았으니

 

 

앞에서 “행자行者가 본제本際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실제는 무엇이며 본제는 무엇이며 중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시이래로 한 번도 이 본제와 실제와 중도를 떠나 있어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았고, 

중간에도 그 자리에 앉았고, 

궁극에도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 앉은 이가 누구겠는가. 

다만 본래그 사람일 뿐이다. 

본래 그 사람을 또 무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것인가.

 

참고로 사전적인 해석을 소개하면 

‘본제本際’란 근본 구경의 맨 끝이며 진여나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實際’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을말한다. 

 

이는 온갖 법의 끝이 되는 곳이므로 실제라 하며, 또는 진여의 실리實理를 증득하여 그 궁극窮極에 이르므로 이렇게 이름한다. ‘중도中道’는 복잡한 해석이 있지만 천태종은 실상實相을 뜻하고, 화엄종은 법계法界를 중도라 한다.

 

깊숙이 법성의 바다에 들어가 

더 이상 다다를 데가 아주 없기 때문에

‘ 궁窮 ’이라 하고, 

 

요긴한 나루터를 차단하여 

범부와 성인에 통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 앉았다.'라 하고, 

 

진眞도없고 망妄도 없어서 

유위有爲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 실實 ’ 이라하고, 

 

일체의 범부와 성인이 몸담을 데가 없기 때문에

‘ 제際 ’라고 한 것이다.

 

궁 · 좌 · 실 · 제 窮坐實際를 한 자 한 자 해석하였다. 선禪의 안목으로 보면 어떤 글자도 어떤 낱말도 모두가 원융무애하고 융통자재해서 풀리지 않는 뜻이 없다.

 

그리고 어떤 것[一物]이라고 불러서 

건드릴 수 없음을

‘ 중中 ’이라 하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끊임없이 밟아 감을

‘ 도道 ’ 라하고, 

 

궁극에 평상平常하여 안배安排를 쓰지 않음을

‘ 상床 ’ 이라고 한 것이다.

 

또 중 · 도 · 상 中道床을 한 자 한 자 해석하였다. 삼승三乘이란 성문승 · 연각승 · 보살승에 대한 세 가지 교법敎法을 말한다. 승乘은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함으로 부처님의 교법을 중생을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데 비유하였다.

 

성문승은 사제四諦의 법문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는다. 

 

연각승은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따위의 이치를 관하여 깨닫는 것이다. 

 

보살승은 육바라밀의 법문이니, 보살은 이 법문을 실천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오성五性은 오성각별五性各別로서 유식종에서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보살정성菩薩定性 · 연각정성緣覺定性 · 성문정성聲聞定性 ·삼승부정성三乘不定性 · 무성유정無性有情의 오종구별이 있다는 것을들었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화장세계華藏世界는 물듦을 여의어서 청정하거늘 어찌 이와 같은 헤아림이 있으리오. 만약 이와 같은헤아림이 있을진댄 어찌 금일에 이르렀겠으며, 만약 헤아림이없을진댄 십보법계十普法界는 어떤 곳을 향하여 출생하는가.

 

화엄경에서는 사람이 사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화장장엄세계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고 선량하여 육바라밀을 닦고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실천하고 인의예지를 생활화하기 때문에 어디를가나 아름다운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마음은 텅 비어 

아무런 계산이나 사량분별이 없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완전무결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왼손으로 한 번 치고는 이르되

“ 불사佛事 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고, 

 

오른손으로 한 번 치고는 이르되

“ 한 법도 보지 않음이 곧 여래다.”라고 하노니, 

 

도대체 알겠는가.

“ 삼천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

 

치문緇門에 

 

“실제이지實際理地에는 불수일진不受一塵이나 불사문중佛事門中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니라.”라고 하였다. 

 

즉 “진리의 땅에는 먼지 하나 받아들이지 않지만 불사를 하는 입장에는 그 어떤한 가지 법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치는 현상을 따라서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고 

현상은 이치를 얻어서 융통자재하게된다. 

 

무엇이든 조화가 중요하다. 

편협과 치우침은 아름다운 삶이되지 못한다.

 

또 증도가에 

 

“불견일법즉여래不見一法 如來니 

 방득명위관자재方得名爲觀自在라”고 하였다. 

 

즉 

“한 법도 보지 않음이 곧 여래이니, 

비로소 이름을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설잠스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문득 다시 증도가를 인용하여 

 

“삼천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중생세계니 기세계니 성인들의 세계니 하는 것이 모두 공허한 언어에 불과한 것이요, 그 무엇도 실체는 없다는 뜻이리라.

 

 

      무비스님이 풀어 쓴 

      김시습의 법성게 선해禪解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