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적멸궁에서 장엄된 삶을 살고 계시다. 적멸은 열반의 번역어이다.
열반이라 할 때
열은 불생이라는 뜻이고,
멸은 불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번뇌와 죄업이 사라진 자리를 적멸이라고 하는 것이다.
궁은 완성된 자리다.
거기에는 안락과 풍요가 있다. 그러므로 삶이 자유롭고 넉넉하다. 원하는 것은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다.
중생에게 보물이 최고라면 그 온갖 보물로 끝없이 치장되어 있다. 그래서 절대 값의 상징으로 보물을 넣어 열반의 세계를 적멸보궁이라 부른다.
반대로 중생은
화택문에서 윤회하고 있다.
화택은 불붙은 집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중생세계를 화택으로 보셨다.
생사가 촌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이라는 경고이다. 이곳에서는 어설픈 머리를 굴리며 허세를 부릴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도중생의 삶이 가장 긴급한 상황에 처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현명한 부모는 어떻게든 가족들의 손을 잡고 이 불타는 집에서 빨리 뛰쳐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부모는 이곳에다 터를 잡고 대대손손 자손을 번창시키며 안주하고자 한다. 지금 여러분은 이 두 부류 중에 어느 쪽을 택하고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택했다. 그 결과로 어리석은 후손은 모두 다 화장장에서 타 죽어야 하는 참혹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이 바로 화마의 고통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미리 알지 못한다. 사육되는 가축들도 도축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그들도 뜨거운 불이 전신을 휘감기 전에는 자신의 삶이 화택 속에 있다는 것을 절대로 미리 예감할 수가 없다.
법화경에서는 중생을 화택 속의 어린아이와도 같다고 말씀하신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장난감을 많이 가진 어린이일수록 바깥으로 탈출할 확률이 적다. 자기가 갖고 있는 장난감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는 아이들은 미련 없이 뛰쳐나갈 수 있다. 여기에서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은 부귀와 명예 등의 오욕을 말한다.
탈출의 조건은 이 오욕을 많이 갖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 화마가 덮치면 어리석은 범부는 온갖 잡동사니를 껴안고 온몸으로 화마에 맞서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맨몸 하나 가지고 바로 뛰쳐나온다.
결과는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게 되는 것이다.
안 가진 자가 아니고 못 가진 자들 중에서 지혜가 없는 바보들은 다른 각도로 집착한다. 중생의 내면에 탐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가지고 못 가지고는 수치일 뿐이지 기본적인 욕망은 똑같다.
아니 많이 가진 자일수록 내려놓을 확률이 사실 더 크다. 가지지 못한 자일수록 더 큰 애착을 품고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가진 자가 놓고 간 것을 주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결코 먼저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없는 자일수록 이 세상에 더 무섭게 도전한다.
이는 꼭 해질녘에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 무리들처럼 저돌적이다. 그들은 뒤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해 무리 지어 이를 악물고 올라간다. 앞에서는 어서 오라 당기고 뒤에서는 빨리 가자 쫓으며 위로만 올라간다.
이들은 마치 죽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인간들과 같다. 한번 삶에 발동이 걸리면 뒤돌아볼 여유가 없다. 정신없이 앞으로만 돌진한다.
죽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시간에 쫓기고 삶에 쫓기며 앞으로만 나아간다. 무상이 그들을 잡아당기고, 뒤에서는 자식들이 그들을 뒤쫓는 형국이다.
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죽음의 행렬에 올라선 슬픈 군상들이라는 사실을 삶이 바빠서 알아차리지 못한다. 죽을 때가 되어 임종의 침대에 누워봐야 정말 허무하도록 바쁘게 쫓아왔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중간에서 이 길이 맞나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 뒤를 돌아봐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쫓아가다 보니 이제 눈앞에 백 척이나 되는 지옥 낭떠러지가 있다.
안 뛰어내리고 싶어도 자기들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후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례로 뛰어내려야 한다.
출근 시간에만 러시아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리 지어 나아가는 어리석은 범부의 삶 자체가 이미 죽기 위해 버둥거리는
러시아워 속 가엾은 생명들이다.
병목현상을 일으키면서 화장장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 자체가 이미 좁은 구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기에
살면 살수록 더 어렵고 더 힘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문이 있다.
문이 있다는 것은 들락거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들어갔으니까 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의 문이 아니라
살 수 있는 문도 있다는 것이다.
원효 스님은 宮 자의 반대 개념으로 門 자를 넣어 중생이 화택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자 하신 것이다.
나무 위의 원숭이를 잡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방법을 알면 의외로 간단하다고 한다. 빈 코코넛 껍질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견과류를 잔뜩 넣어두면 원숭이가 냄새를 맡고 와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한개씩 끄집어내 먹다가 사람이 오면 소유욕이 생겨 한 움큼의 견과류를 집고 달아나려 한다. 하지만 그 한 움큼 때문에 손이 빠지질 않는다. 그것을 놓으면 살고 놓지 못하면 잡힌다. 원숭이는 움켜쥔 먹이가 아까워서 죽어도 손을 펴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해탈과 윤회는
탐욕을 얼마나 굳게 가지느냐,
아니면
그것을 얼마나 헐겁게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탐욕은 탐착과 애욕의 결합어이다.
이것은 중생의 마음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쉽사리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의 가슴에는 탐욕이라는 날카로운 비수가 그대로 숨겨져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사자의 발톱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맹렬하게 공격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함경 말씀이다.
탐욕 때문에 고뇌가 일어난다.
탐욕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탐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그 사람은 고뇌로 인한 슬픔이 없다.
하물며 두려움이겠는가.
범부는 탐욕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도 없다. 그것은 그 어떤 마음의 기교나 작의로도 가능하지 않다.
탐욕을 버리면 소승에서는 아라한과를 얻고 대승에서는 10주에 오른다. 즉 반야심경을 깨닫는 정도의 지위에 오른다.
그러면 중생세계에서 당해야 하는 거친 고통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하늘을 날고 물속을 유영한다.
따라서 범부가 탐욕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다겁 동안 수많은 고통의 수행을 하셨기에 탐욕이 버려진 것이고,
그만큼의 세월 동안 중생은 탐욕을 버리지 않으려고 끈질기게 악을 쓰면서 여기까지 버텨온 것이다.
그 결과 한쪽은 부처가 되어 적멸궁에서 장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고,
또 한쪽은 중생이 되어 화택문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선택은 주어졌다.
화택의 문을 열고 나와 자유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화택 속에서 고통의 절규를 끝없이 내지를 것인가. 지혜와 복덕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은 여기서 엄청나게 큰 인생의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여기서 원효성사는
부처는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셨고,
중생은 중생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가 반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곳이 좋은지 하나는 택해야 한다. 선택권은 본인이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중생이 좋다고 생각하여 중생 쪽을 택해왔고,
그 결과로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제 부처의 세계도 알았으니
선택의 길이 하나 더 주어지게 된 셈이다.
발심수행장 - 공파스님 중에서
선문禪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