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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깨달음의 인연] 현존의식

배휴와 황벽



마하리쉬가 말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면 순수한 앎(의식)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존재의 근원이 빛으로 드러난 것이 순수한 의식이며 순수한 의식이 나라는 자각이다.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마음을 비추는 의식이 나인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고 있는 몸은 의식의 도구일 뿐이며 우연히 나타난 사건이나 현상이라는 통찰이다. 

 

그러므로 심경은 몸과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길 위에 떨어진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신이 몸과 마음을 가진 한 개인으로서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배휴라는 사람과 순수한 의식이 나라는 앎과 하나가 되어있는 황벽선사와의 선문답을 통하여 심경이 우리에게 건내주고 있는 반야의 향기를 만나보자.

     

이 이야기는 황벽선사가 입적하고 나서 약 3 년이 지났을 무렵에 배휴가 선사로부터 직접 전해받은 가르침의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만든 전심법요라는 책 속에 담겨있는 내용이다

     

당나라에서 상국相國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신심이 깊은 불자였던 배휴(裵休.797-870)가 홍주 개원사를 찾아와 조사각에 들렸다가 벽에 걸려있는 한 고승의 그림을 보고 나서 황벽(黃檗. ?-850)에게 물었다.

     

“스님, 저 그림 속에 있는 고승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질문을 받은 황벽이, 배휴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배 상공!”이라고 불렀고,  배휴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배휴가 크게 놀라며 깨우쳤다는 이야기이다.

     

배휴는 1인칭으로서 2인칭인 황벽에게 3인칭인 그림 속의 고승에 대하여 묻고 있었다.

 

배휴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배휴가 몸과 마음이 나라는 개체의식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배휴는 자신과 황벽 그리고 그림 속의 고승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실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배휴의 무지를 깨우쳐 주고 싶었던 황벽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가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배휴를 부른다. 

 

나와 세계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의식의 바다 위에서 함께 일어나고 가라앉는 환幻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 순간에 깨우쳐주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안에 흐르는 순수한 생명 의식으로서 그리고 공이라는 근원적인 성품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우치도록 유도하기 위한 ‘할’이었던 것이다.

     

이 순간 배휴가 깨우쳤는가 아닌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배휴가 바로 우리자신이기 때문이다.

     

지난 밤에 거지가 된 꿈을 꾼 인도의 자나카라는 왕이 스승에게 물었다. 

 

“제가 거지가 된 꿈을 꾼 왕입니까, 아니면 왕이 된 꿈을 꾸는 거지입니까? “ 

 

스승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가 아니기도 합니다. 둘 다 인 것은 잠시나마 그대가 꿈을 꾼대로 행동했기 때문이고 둘 다가 아닌 것은 그 내용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것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이다.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이 없다면 세계도 없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있으므로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다는 것은 나의 주위에 하나의 세계가 창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세계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도 

“내가 있다”라는 현존의식이다.

 

언제 어디서나 이 현존성의 느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실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실재로서 실재에 참여하는 일이다.

     

파란 하늘 위의 뭉게구름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과거 속의 고승에 대하여 물을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충고이자 당부인 것이다.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존재 그 자체이며 그 존재를 인식하는 의식이다. 불멸성이란 나라는 관념으로부터의 해탈인 것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의식으로서의 내가 있으므로 황벽이 있고 고승이 있게 된다.

 

의식이 없으면 나도 없고 황벽도 없으며 고승도 없다. 의식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순수한 의식으로서 모두가 하나인 것이며 개인이란 단막극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배우와 같이 무상한 것이다.

     

얼굴-거울-상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마음(의식)이라는 거울 앞에서 나를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내가 우주만물이고 삼세제불이 모두 내가 된다.

 

     

이 당시의 황벽은 자기 자신과 질문을 하고 있는 배휴와 그림 속의 고승 모두가 순수한 의식으로서 그리고 공의 성품 안에서 하나라는 앎과 일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슴을 울리는 선문답 중 하나이며 붓다께서 꽃을 들어 올리신 것이나 심경이 우리에게 설법하고 있는 반야가 이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이라고 말하면 색의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텅 비어 있는 상태 또는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념 무상의 상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심경이 이야기하는 공을 맑은 하늘이라 한다면 그 맑은 하늘에 아무런 원인이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나 비는 색이 된다. 

 

구름이나 비가 있어도 하늘이고 구름이나 비가 사라져도 여전히 하늘이다. 

 

색과 공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보는 대신 색이 공에 같이 들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 따로 공 따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붓다의 연기법-

 

     

스스로 생할 수도 없고 홀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대상으로서의 붓다까지 부정하라고 말한다. 그래야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모든 것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나라는 관념은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경은 끝까지 남아있는 그 나를 부정하는 것, 그것을 조견오온개공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照見五蘊皆空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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