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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깨달음의 인연] 마음의 작용

허공이 강론할 수 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말하였다.

 

“어딘가로 돌려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자연히 네가 아니다. 네가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은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렇다면 너의 마음이 본래 미묘하여 밝고 깨끗한데, 네가 미혹하여 근원을 잃고 윤회를 받아 생사 속에서 항상 떠돌고 잠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런 까닭에 내가 가련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일체중생은 지금의 보는 정기와 밝은 마음이 진(眞)이나 망(妄)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니, 이치에 어두우면 거칠고, 밝으면 미묘하다.

 

보는 성품이 상주함을 분명히 안다면 어찌 경계를 따라 흘러다녀 본래의 참됨과 영원함을 잃어버리고 고통스런 윤회에 영원히 빠져 죽음의 바다를 항상 떠다니겠는가.

 

아난은 의심을 일으켜 보이고 이것에 의지하여 정식(情識)의 집착을 타파하고, 석가모니께선 자세한 가르침을 베풀어 깨달음의 근원을 바로 가리켰으니, 

 

범부의 몸을 바꾸지 않고 성인의 본체를 단박에 이루며, 생멸을 나타내어 원만함과 영원함을 환히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또 강서마조(江西馬祖)가 양(亮) 좌주(座主)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경을 공부했는가?”

 

대답하였다.

 

“30여 권의 경론을 강론했습니다.”

 

스님이 물었다.

 

“강론할 때 무엇을 가지고 강론하는가?”

 

대답하였다.

 

“마음을 가지고 강론합니다.”

 

스님이 물었다.

 

“마음은 솜씨 좋은 기술자와 같고 의식은 그를 따르는 기술자와 같을 뿐인데, 어떻게 저런 경전을 강론할 줄 알겠는가?”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허공이 강론한다고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도리어 허공이라야 강론할 수 있지.”




양(亮) 좌주가 이 말에 크게 깨닫고 마침내 섬돌 밑으로 내려가 마조스님께 예배하면서 갑자기 스스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자 스님이 말하였다.

 

“이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아, 절은 해서 뭣 하려는가.”

 

그 좌주는 그 길로 자신의 본사로 돌아가 학인들에게 말하였다.

 

“내 일생 동안 쌓은 학업이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오늘 개원사(開元寺) 노스님의 한마디 질타를 당하고서는 완전히 없어졌다. 내가 오랜 시간 동안 여러분에게 해준 강의는 모두 여러분을 속인 것이다.”

 

마침내 학인을 해산하고 한 번 서산(西山)에 들어간 뒤로는 소식이 없었다.

 

   

또 어떤 학인이 마조화상에게 물었다. 

 

“물처럼 뼈나 근육 없이도 만 섬을 실은 배를 띄울 수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물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 뼈와 근육을 말하겠는가?”



또 학인이 용담(龍潭)화상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용담(龍潭)의 명성을 들었는데 찾아와 보니 어떻게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보이지 않는가?”

 

스님이 말씀하셨다.

 

“도리어 그대가 용담에 잘 온 것이네.”

 

   

또 세속의 관리인 왕상시(王常侍)가 동산(洞山)화상에게 물었다.

 

“52위(位)의 보살 중에 어째서 묘각보살은 보이지 않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도리어 상시께서 친견하셨군요.”

 

그러므로 지자대사(智者大師)가 한평생 널리 가르침을 펼쳐 비록 상세하게 열어 보였으나 바른 종지만 드러냈을 뿐이다. 

 

이것은 『지관(止觀)』에서 

 

“구경(究竟)에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작용이 소멸하니, 영원히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명추회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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