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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인드라망의 구슬

 

 

진리의 메시지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큰 신비의 주이며,

큰 광명의 주이며,

위없는 주이며,

 

견줄 바 없는 주이며,

능히 온갖 고통을 없애므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모두가 서로 의존하며 생존한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가닥의 실로 짜여 있는 천과 같고, 여러 갈래의 노끈으로 매듭을 지으면서 이루어진 그물과 같은 것이다.

 

올해 유치원을 다니는 준이는

 

건강하고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어쩜 저렇게도 잘생기고 영리한 아이가 있을까?” 많은 사람의 칭찬을 받은 준이는 기분이 좋아 엄마 아빠에게 자랑하였다.

 

그 말을 들은 아빠와 엄마는 웃으면서 서로 자기를 닮아서 그렇다고 우겼다. 준이는 할아버지에게 가서 “아빠는 누굴 닮아서 공부를 잘하였나요?” 하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을 닮아서 그렇다고 하였다.

 

방학 때 외갓집에 놀러갔다가 준이는 외할머니께 엄마는 누굴 닮아 예쁘냐고 물으니 옆에 있던 외할아버지가 먼저 “그건 내가 미남이라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냥 웃고 계셨다.

 

어느 날 엄마의 친구가 놀러 와서 “아이구, 우리 이쁜 준이 잘 도 생겼네!”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이 난 준이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외갓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엄마의 친구는 “아니야! 그건 너희 엄마 아빠가 처녀 총각일 때 엄마 친구인 내가 중매를 잘 해준 덕분이란다. 그래서 우리 귀여운 준이가 태어난 거야. 요 녀석아! 그러니 아줌마한테 잘해야 해! 알았지!”라고 하면서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였다.

 

준이는 어리둥절해졌다. 그 모습을 본 엄마와 아빠, 엄마의 친구는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의 준이가 있게 된 것은 엄마와 아빠를 만나게 해 준 사람의 덕도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증조부(曾祖父)와 증조모(曾祖母)가 있었기 때문이며, 할머니는 진외가(陳外家)의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와 진외증조모(陳外曾祖母)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외증조부(外曾祖父)와 외증조모(外曾祖母)가 있었기 때문이고, 외할머니는 외외증조부(外外曾祖父)와 외외증조모(外外曾祖母)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부계(父系)와 모계(母系)로 간단하게 4대(代)만 살펴보아도 증조부와 증조모가 여덟 분이니, 고조부(高祖父)와 고조모(高祖母)는 모두 열여섯 분이나 된다.

 

우선 준이가 태어나려면 부모가 있어야 하고, 부모님을 맺어 준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모가 있기 위해서 조부모들이 있었고 조부모들을 맺어준 분과 그 분의 조상과 그리고 윗대의 수많은 조상들과 그 조상과 조상이 만나게 되는 여러 요인들이 있어야 한다.

 

오랜 옛적 바이칼 호 주변에 살던 준이의 먼 조상 가운데 한 분이 청년 시절에 사냥을 나갔다.

 

청년은 하늘을 맴도는 수리매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었지만 이를 눈치챈 수리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매를 쫓던 청년은 그만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어느 외딴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인연으로 그 집의 처녀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때 잡으려던 수리매는 까치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고, 까치는 마침 피어 있던 야생화에 앉은 나비를 노리고 있었다. 만약 그때 야생화가 피지 않았다면 나비가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고,

 

나비가 없으니 그를 노릴 까치도 거기 없었을 터이며, 까치가 없으니 수리매가 거기에 맴돌지 않았을 것이고, 청년은 길을 헤매지 않았을 것이며 그 외딴집에서 처녀를 만나 가정을 이루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리매도 까치도 나비도 야생화도 오늘의 준이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 야생화는 몇 년 전 어떤 새가 씨앗을 물고 가다 떨어뜨려서 피어났다면, 꽃씨를 물고 가던 새도 준이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우리가 섭취하는 영양원이 우리의 체질을 변화시키기도 하니, 준이의 먼 조상들이 마시고 먹던 샘물이나 식물이나 동물 또는 광물질인 영양원의 영향도 오늘의 준이를 있게 한 미미한 요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영양원이 광합성을 일으킬 때 해와 달과 먼 은하계의 별에서 온 빛이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도 준이를 형성하는 미미한 연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의 준이가 있기까지 과거를 소급해 보면 물론 조상은 한 분도 빠짐없이 동참했고, 온 인류와 함께 인류의 역사가 동참하였으며, 대자연이 모두 다 동참했던 것이고, 온 우주가 동참한 것이니,

 

준이는 그대로 작은 우주인 것이다.

 

준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생물과 심지어 광물(鑛物)마저도 그러한 것이니,

이 세상 낱낱의 만물 모두가 얼마나 위대한 우주적인 존재인가?

 

어린 준이가 오늘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너게 되었다. 준이가 멈칫대고 있는데 저기서 차가 한 대 오고 있었다. 준이는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에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얼른 오른손을 들고 아장아장 건너갔다.

 

운전하던 젊은 분은 잠시 멈추고 준이를 바라보며 ‘참 귀엽게 생겼구나!’ 생각하면서, 갑자기 어린 나이에 잘 크다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조카가 떠올랐고 곧 한번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준이가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차는 다시 출발했는데, 다음 네거리에서 막 켜진 빨간 정지 신호에 걸렸다. 다시 파란 신호등이 켜져 출발하였지만 다음 네거리에서 정지 신호에 걸렸다. 다시 출발하여 한참을 지나 커브 길을 돌아서 가는데,

 

뒤에서 급히 따라오던 트럭이 추월을 하려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장면이 큰 사고가 생긴 것 같아 걱정되었지만 운전자는 그대로 운전을 계속해 가버렸다.

 

얼마 후 사고 현장에 경찰이 오고 구급차가 오고 보험회사에서 오고 기자들이 모여 들었다. 다친 사람은 병원으로 실려 가고, 응급실에서 의사들이 수술하였고, 다행히 위기는 넘긴 그 사람은 회복실로 옮겨졌다. 전화를 받은 가족들이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오고 친지들이 서둘러 병문안을 왔다.

 

경찰이 조서를 꾸며서 보고를 하니 도로에 있는 전광판의[오늘의 교통사고] 숫자에 계수(計數)가 올라갔다. 보험회사에서는 절차를 밟고 보험수가를 조정했다. 기자들은 현장의 사진을 찍고 방송사로 원고를 써서 보냈다.

 

저 차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건너야겠다고

 

한 생각에

준이는 손을 들게 되었고, 고사리 같은 손을 한 번 든 작은 몸짓이 그 차의 동선(動線)을 바꾸어 그날 그런 사건을 연이어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날 시내 모든 차량의 동선을 바꾸었고 다음날은 전국 도로망의 차량 동선을 다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구급차의 운행과 경찰, 보험회사 직원들, 기자와 병원 의사 등등 여러 사람들의 동선을 바꾸고 또 그 사람들과 연관된 가족들의 동선, 사고 통계의 수치 조정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연기(緣起)가 방향과 시간을 다르게 파급되어 나갔고 그 영향은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 파급될 것이다.

 

준이가 손을 들지 않고 조금 늦게 건넜더라면 골목에서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집에도 조금 빨리 도착하여 엄마가 유치원에 전화하지 않았을 거고, 그날 저녁 그런 뉴스도 보지 않았을 거다.

 

준이의

한 생각 일으켜 손을 든 것이

세상을 바꾸게 되었다.

 

그의 생각에 따라 그의 동선도 바뀌면서 찰나마다 연기 작용을 다르게 일으키게 되었다.

 

소위 나비 효과인 것이다.

 

나비 효과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드라 망(Indra 網, 因陀羅網)의 이치이다. 인드라(Indra)는 도리천(忉利天)의 왕인 제석천(帝釋天)을 말하며, 제석천이 머무는 내원궁(內院宮)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그물이 인드라망(網)이다.

 

 인드라 망의 그물코마다 밝은 보배 구슬이 붙어 있는데, 각각의 보배 구슬에는 다른 보배 구슬의 그림자가 모두 비치며, 거기에 비친 하나하나의 구슬 그림자 속을 보면 거기에는 또 모든 보배 구슬을 머금은 그림자가 거듭하여 모두 아롱져 비치고 있다.

 

다시 그렇게 모든 구슬마다에 거듭거듭 반영된다. 우리가 양손에 거울을 들고 두 거울을 마주 비추어도 서로 비추기를 거듭거듭 무한히 하는데, 온 그물의 코마다 매달린 영롱한 보배에 비치는 수많은 보배의 그림자가

 

중중무진(重重無盡)하다면 이 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일인가?

이러한 인드라 망의 이치가 저 하늘의 도리천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바로 인드라 망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찰나찰나 걸음걸음마다 연기(緣起)의 그물코가 생기는데, 그 그물코는 중중무진한 연기를 거치면서 매듭지으며 온 끈들이 맺어진 것이다. 이 그물코에는 저절로 구슬이 아롱지는데 그 속에는 끈이 다른 끈과 매듭을 지어 오는 동안 주고받은 모든 그림자가 다 담겨 있다.

 

끈과 끈을 서로 엮어 만나 그물코를 만들듯, 선과 선이 이리 저리 얽히고설키면서 매듭지어 가는데 어떤 때는 한 선이 수많은 선으로 된 동아줄을 만나기도 하고, 수많은 선으로 된 동아줄끼리 만났다가 다시 수천 갈래로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의 연예인이 수많은 청중이나 관객을 동시에 만나거나 팀과 팀끼리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한 만남마다 인연의 구슬이 맺히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그렇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끝없이 이렇게 연기하며 가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주의 불가사의한 정보도 미래의 무한 연기를 일으킬 비밀도 모두 깊이 갈무리하고 있다.

 

나[我]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人]이 그러하고,

모든 중생(衆生)이 그러하고,

모든 존재[壽者]가 그러하고,

모든 삼계(三界)의 만유(萬有)가 그러하다.

 

모든 존재는 원초의 불가시(不可視)한 빛을 프리즘을 통해 연출 한 홀로그램이다.

 

모든 존재는 태초에 말씀이 있어 그 말씀이 말씀들을 낳고 낳아서 생긴 또 다른 말씀의 메아리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는

하나가 전체를 머금고

전체가 하나로 스며 있는

인드라 망의 구슬이다.

 

모든 존재는 그대로 청정한 진리의 몸이 제각기 인연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나타난 ‘마하무드라’의 몸짓이다.

 

이 불가사의한 정보와 비밀을 풀어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올바른 연기의 실천적인 삶을 사는 열쇠가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것으로

텅 빈 것임을 바로 보아 깨닫고

이를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것으로 텅 빈 것임을 바로 보아 깨닫고,

正見

 

이를 바탕으로 바른 사유와

正思惟

 

바른 말과

正語

 

바른 행위와

正業

 

바른 생활과

正命

 

바른 정진과

正精進

 

바른 생각과

正念

 

바른 선정을

正定

 

실천하면서

自利

 

런 주체 아닌 주체의 삶 속에서 연기되는 모든 대상 아닌 대상인 유정과 무정을 동화 시켜나가는 ‘바라밀’을 실천하며

同化

 

정토를 구현하는 것이다.

利他

 

‘반야바라밀다’는

진리를 밝혀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聖者)의 원음(圓音)으로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묘하고도 신통하고 신령스런 말씀이며 가르침이며 소식이며 희망의 메시지이다

是大神呪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것이 텅 빈 것임을 밝게 보는 것이니,

照見

 

천 년의 어두움이 일시에 밝아지듯 영겁의 무명이 사라지고 밝은 지혜로 모든 현상을 명명백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위대한 광명의 말씀이며 가르침이며 소식이며 희망의 메시지이다

是大明呪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최상의 지혜이며 일체의 고액을 건지는 최상의 자비이며, 이보다 더할 나위없는 말씀이며 가르침이며 소식이며 희망의 메시지이다

是無上呪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존재는 조건이 상호의존하며 연기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지만, 상호의존하는 조건이 제각기 다른 것이므로 그 조건을 잘 살펴

다르면서도

無等

 

같고

 

같으면서도 다름을 알아 지혜롭게 실천·연기(緣起)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다른 지혜를 일깨우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말씀이며 가르침이며

소식이며

희망의 메시지이다

無等等呪

 

우리는 이제는 편리만 좇으며 물질문명을 추종하던 그 몽상(夢想)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상호의존하는 관계 속에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더불어 있다’

 

는 연기(緣起)의 원리를 깊이 깨닫고 존재의 참모습을 바로 보아야 한다.

 

존재의 참다운 모습,

즉 실상(實相)은

연기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항상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그 실체는 공(空)한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에 눈을 뜨게 될 때

나와 남, 나와 대상 세계를 나누던 벽이 무너져서 모두가 하나

 

이것이

둘이 아닌 진리,

즉 불이법(不二法)이며

대평등(大平等)의 세계이다.

 

옛사람은 그러한 세계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天地與我同根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萬物與我同體

 

이것은 나와 남과 다른 생명 그리고

자연과 우주와 한 몸을 이룬 소식이다.

 

이 둘이 아닌[不二] 진리가 바로 불교의 사상적 기초이다.

 

따라서 그 진리에 눈뜨자는 것이 다름 아닌 불교이다.

나와 대상을 나누던 벽이 허물어져

 

‘하나ʼ가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삶이 전개된다.

 

나와 남이 하나인 동체(同體)이니, 남의 고통이 바로 나의 고통이므로 함께 아파하며 나의 즐거움은 남과 더불어서 함께 나누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존재는 없으며, 연기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그 실체는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다.

 

공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립할 수 있으니

공이야 말로 제법의 실상이다.

 

불교의 공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허무주의가 아니다.

 

모든 현상에는 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참 생명은 너와 내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니므로,

 

공사상은 주위의 이웃들과 자연과 서로 하모니를 이루면서 모두를 정화시켜

 

나가는 실천적인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사상을 바탕으로 대승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이다.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내가 없으면 네가 없고’

‘네가 있어 내가 있는’

 

 

연기적인 흐름 속에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나와 이웃이 둘이 아니고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니고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최상의 지혜이며 일체의 고액을 건지는 최상의 자비인 반야바라밀다의 실천적인 삶은 모든 존재를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能除一切苦

 

진리를 밝혀 위대한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의 진리의 말씀인 반야바라밀다의 진언은 진실하여 거짓이 아니다

 

 眞實不虛

 

     진실한 말 가운데 비밀한 말 펴시면서

     眞實語中宣密語

 

     하염없는 마음속에 대비심을 일으키네.

     無爲心內起悲心

 

                    현봉스님 반야심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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