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찾은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다.
不離當處常湛然
불리당처상담연
覓則知君不可見
멱즉지군불가견
우리가 일상 행(行)·주(住)·좌(坐)·와(臥)에서 이 물건을 떠나려야 떠날 수 없고 언제든지 이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서도,
진리의 광명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
항상 그 광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입니다. 담연(湛然)이란 청정하여 때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진여자성이란 것을 일체 중생인 유정(有情)·무정(無情)이 다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청정하여 때가 없습니다.
‘찾은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다’ 함은, 찾으면 분명히 알지만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배고프면 밥 달라 하고 추우면 옷 달라고 하니 분명히 알지만, 그 자체를 찾아보려고 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찾은즉 그대를 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으로 진여대용이 그대로 있으니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쌍차(雙遮)가 되어서 일체 명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에 보려야 볼 수 없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이차(照而遮)하고 차이조(遮而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모든 것이 다 청정무구(淸淨無垢)하여 일체 명상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걸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해석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명상이 끊어진 것만 가지고 주장하게 되는 것으로써 쌍차쌍조(雙遮雙照)한 중도정견은 아닙니다.
혜가스님의
“밝고 밝게 항상 아나 말로써 미칠 수 없다
了了常知 言之不可及
는 말씀과 같으니 거기에서 혜가스님은 달마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밝고 밝게 항상 안다’는 것은 곧 ‘찾은즉 그대를 안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지만 ‘말로써 미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명상이 다 끊어져서 말하려야 말할 수 없고 보려야 볼 수 없으며 들으려야 들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쌍차쌍조한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 전체가 다 드러나서 중도정견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찾으려고 해도 볼 수 없다’고 하면 이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라 변견적인 해석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取不得捨不得
취부득사부득
不可得中 只麽得
불가득중 지마득
모든 명상이 다 떨어진 진여자성에서는 한 명상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취하려야 취할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명상이 떨어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전체가 허공 속에 건립되어 있지만, 허공은 잡으려야 잡을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뜻은 모든 명상이 본래 공한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앞 구절의 ‘당처를 여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면 일종의 단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중도정견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중도정견이 되느냐?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찾은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찾아보면 분명하게 역력히 항상 알 수 있지만 모든 명상이 다 떨어져서 생각하려야 생각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하려야 표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불교의 근본인 중도정견이 확립되는 것이지 만약 ‘취하려야 취할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다’는 여기에만 치우쳐 해석하게 되면 실제로 정견이 아니고 변견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취하려야 취할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해야만 위 구절의 바른 해석입니다.
말 없을 때 말하고 말할 때 말 없음이여
크게 베푸는 문을 여니 옹색함이 없도다.
黙時說說時黙
묵시설설시묵
大施門開無壅塞
대시문개무옹색
‘취하려야 취할 수 없고 버리려야 버릴 수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설(說)과 묵(黙), 묵이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을 때로서 아주 적적(寂寂)한 것을 말하며, 설이란 이야기할 때로써 아주 시끄러운 것을 말합니다.
또 묵이란 차(遮)를 말하고 설이란 조(照)를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는 것으로써, 묵이 곧 설이고 설이 곧 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쌍차(雙遮)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한다’는 것이 될 것 같으면 설과 묵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때가 가만히 있을 때이고 가만히 있을 때가 말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적적한 가운데 광명이 있고 광명이 있는 가운데 적적함이 있어서 말과 묵이 완전히 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움직임 가운데 머뭄이 있고 머무는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서 움직임이 머뭄이고 머뭄이 움직임이며, 진(眞)이 곧 가(假)요 가(假)가 곧 진(眞)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양변이 원융무애하고 융통자재한 것을 표현하여 ‘묵묵할 때 말하고 말할 때 묵묵하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전체에 다 통하는 것입니다.
‘크게 베푸는 문을 열어 옹색함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서로 다 원융하게 통해서 무애자재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자재하다는 말입니다.
여기 와서는 묵과 설이 통하는 동시에 선과 악이 통하고 마구니와 부처가 통합니다. 생멸이 완전히 끊어진 부사의해탈경계에서 진여대용이 현전한 것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곧 사사무애(事事無碍)이며 이사무애(理事無碍)입니다.
‘찾은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다’고 한 이 자체를 분명히 알 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서 하나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의신심명 증도가 강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