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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중도정견

 

즉색즉공(卽色卽空)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하며 범에 즉하고 성에

즉함이 돈오입니까?”

 

“그러하니라.”

 

問 卽色卽空하고 卽凡卽聖이 是頓悟否아

 

答 是니라.

 

여기서는 긍정적인 면에서만 하는 말입니다.

즉색즉공(卽色卽空)이란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라는

색과 공이 원융무애한 것을 말한 것이고,

 

즉범즉성(卽凡卽聖)이라는 것은

범부가 즉 성인이고

성인이 즉 범부라는 것으로써,

 

이는 범부와 성인이 무애자재함을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며

범즉시성凡卽是聖 성즉시범聖卽是凡이니

돈오할 것 같으면 쌍차가 곧 쌍조가 되어서

원융무애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 색에 즉하고 공에 즉함이며 어떤

것이 범부에 즉하고 성인에 즉한 것입니까?”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색이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공이며,

마음에 물듦이 있음이 곧 범부요

마음에 물듦이 없음이 곧 성인이니라.

 

또한 진공묘유이므로 곧 색이요

색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곧 공이니,

지금 공이라고 말한 것은

이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은 아니니라.

 

지금 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공의 성품이 스스로 색이요,

색이 능히 색인 것은 아니니라.”

 

云何是卽色卽空이며 云何是卽凡卽聖고

 

心有染이 卽色이요 心無染이 卽空이며 心有染이

卽凡이요 心無染이 卽聖이니라 又云 眞空妙有故로

卽色이요 色不可得故로 卽空이니 今言空者는

是色性이 自空이요 非色滅空이며 今言色者는

是空性自色이요 非色能色也니라.

 

 

마음에 물듦이 있다[心有染]’ 하니 이것은

생멸의 물듦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나

이것은 생멸의 물듦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어지지 않고 있는 성품[不斷有性]’이란

변견에 떨어져 있는 성품이 아니며

유무(有無)의 있는 성품[有性]이 아니고

 

양변이 완전히 통한 중도의 있는 성품[有性] 이라고

하였듯이, 이 단에서는 돈오를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

로 생멸의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중도의 뜻으로 말

하는 것입니다.

 

이 ‘물듦이 있다[有染]’는 것은

변견적인 생멸의 물듦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묘용의 활동을 가지고 말하는 것으로써

묘유(妙有)의 있음[有]입니다.

 

이렇게

묘유의 있음[有]인 줄 알아야지

생멸의 있음[有]인 줄 알면 이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물듦이 있음[有染]’이란

묘유의 있음[有]인데 이것을 색(色)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 색은 묘색(妙色)입니다.

 

앞에서도 여래묘색신(如來妙色身)이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서의 이 색도 묘색을 말하는

것으로써

 

있음[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있음[有]인 중도의 색인 것입니다.

 

이것을 즉색즉공(卽色卽空)이라 한 것이니

차별적인 생멸의 있음[有]을 가지고 말하게

되면 색과 공이 둘이 되어 돈오라고 할 수 없고

깨달음이 아니며 중도가 아닙니다.

 

물듦이 있음[有染]과 물듦이 없음[無染]이

생멸의 있고 없음[有無]이 아니고

중도의 무애자재한 있고 없음[有無]인 줄 알면

범부와 성인이 서로 통하고

있음과 없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색(色)이라는 것은 묘색이며

묘색이란 생멸의 색이 아니기 때문에

색을 아무리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색을 찾아볼 수 있다면

이것은 생멸의 세계이지 묘유의 색이 아니며

중도의 색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이란 진공의 공이요

있음[有]이란 묘유의 있음[有]이므로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자재한 것입니다.

 

‘공이란

색의 성품이 스스로 공함이요

색이 없어져서 공한 것이 아니다’ 함을

잘못 알게 되면 불교에 대해서 큰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공이라고 해서

일체 색이 다 없어지는 것을 공이라고 하면

외도의 견해인 단멸의 공이 되고

중도정견의 공이 되지 못합니다.

 

 

 

색도

‘공한 성품’이 스스로 색이지

색 그 자체로서 색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능히 자체로써의 색[能色]’이라는 것은

생멸의 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즉색즉공이며 즉범즉성이니

이것은 양변이 완전히 떨어진 중도정견

곧 생멸변견이 아닌 무애자재함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 중도정견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하기도 하고

묘법이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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