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념과 무념
또 게송으로 말하였다.
생각이 있으면 그 생각이 삿되게 되고
생각이 없으면 그 생각이 바르게 된다.
又云 有念念成邪 無念念卽正.
강 설
이 게송은 많이 생략되었다.
온전히 인용하면 이렇다.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이 나를 읽고,
마음이 깨어 있으면 내가 법화경을 읽는다.
경을 외운 지 오래 되었어도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그 뜻과는 원수가 된다.
생각이 없으면 그 생각이 곧 바르게 되고
생각이 있으면 그 생각이 삿되게 된다.
생각이 있고 없음을 함께 헤아리지 않으면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항상 타게 되리라.
心迷法華轉 心悟轉法華
誦經久不明 與義作讎家
無念念卽正 有念念成邪
有無俱不計 長御白牛車
이 게송에는 유래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간단히 소개한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법달(法達)이라는 스님은
일곱 살에 출가하여 평생 동안 『법화경』을
공부하였는데 3천 번을 독송하였다.
법달이 혜능 스님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이에 혜능 스님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절이란 본래 아만을 꺾자는 것인데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것이 있으면 죄가 일어나고
자신의 공로를 잊으면
그 복이 비교할 수 없이 많으리라.
禮本折慢幢
頭奚不至地
有我罪卽生
亡功福無比
법달은 『법화경』을 3천 번이나 읽고 나서
불교를 잘 안다고 생각하여 아만이 대단히
높았던 것이다.
혜능 스님이 법달을 위해서 일러준 법문이
위의 게송이다.
마음이 밝아야 경전을 읽는 것이지
마음이 캄캄하면 경전을 읽어도 오히려
경전에 사람이 읽히는 경우가 되고 만다.
게송에서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항상 타게 되리라’라고
한 말은 일불승(一佛乘)을 깨달아
일불승의 삶,
즉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리라는 뜻이다.
『법화경』에서
인간의 궁극적 차원을 일불승이라고 하며
성문승[양이 끄는 수레]과
연각승[염소가 끄는 수레]과
보살승[소가 끄는 수레]을 넘어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라고
비유한 데서 온 말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데도 사람들의 수준과
성향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혹자는 복을 비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으며,
혹자는 세상에서 도피하여 한가하게 사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으며,
또 혹자는 남을 위해 보살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는 등
사람에 따라 불교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점을
『법화경』에서
수레에 비유하여 밝히고 있다.
옛말에
“마음에 반조하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라고 하였다.
心不返照 看經無益
불교는 결국
마음의 이치를 밝히는 공부다.
마음을 떠나서
글자만 읽으면 아무리 많이 읽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마치 국을 뜨는 국자가 국을 오랫동안
떠 날라도 국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또한,
경전을 출판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토록 훌륭한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면서
수많은 경전을 만들어 내지만
아무런 감동도 없이 그냥 기계적으로
책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경전을 아무리 읽어도
진정한 뜻을 모르는 사람도 그와 같다.
유념과 무념을 모두 벗어나서
유와 무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유와 무를 모두 원융하게 조화롭게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야
일불승(一佛乘)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탈 수 있다.
곧 부처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 직지 강설(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