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으면 그대로 쓸 뿐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이라고 한다.
玄旨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막
‘스님께 묻습니다.’ 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道流
把得便用
更不著名字
號之爲玄旨
山僧說法 與天下人別 祇如有箇文殊普賢
出來目前 各現一身問法 纔道咨和尙 我早辨了也
老僧 穩坐 更有道流 來相見時 我盡辨了也
何以如此 祇爲我見處別 外不取凡聖 內不住根本
見徹 更不疑謬
강설(講說)
어떤 젊은 스님이 경허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경허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대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게.
착함이건 악함이건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하게.
그러나
털끝만큼이라도 머뭇거린다든가
후회 같은 것이 있어서는 안되네.
망설임과 후회만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하게.
바로 이것이 산다는 것일세.”
이 법문은 언뜻 보기에는
막행막식(莫行莫食) 해도 된다는 말로
보일 수도 있지만,
‘털끝만큼이라도 머뭇거린다든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막행막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매순간
미래에 대한 망설임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이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니,
선과 악을 초월해서
무심행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임제스님의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법문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청담스님이
일본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해도
전혀 약을 쓰지 않아서
인욕보살이라 알려졌다 합니다.
어느 법문에서 도를 깨달으면
꼬집어도 안 아프다고 했는데,
과연 안 아플까요?
이것은
마음을 쓸 때 끄달려 가지 말라는
차원에서 말씀 하신 것이고,
끄달림이 있고 없고에
바로 성인과 중생의 차이가 있습니다.
임제스님은
오직 하나의 마음을 철저히 깨달아
여의지 않은 도리만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의 도리에
마음을 두고 있기에
알아차려서 끄달려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 임제록 강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