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선문禪門

머무는 바 없는 마음

 

무생심(無生心)

 

“만약 마음이 청정함에 머물 때에는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까?”

 

“청정함에 머뭄을 얻었을 때에 청정함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 청정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問 若心住淨時 不是着淨否

答 得住淨時 不作住淨想 是不着淨

 

이 물음은

일체 망상을 모두 쉬고 자성청정심, 즉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친 뒤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여자성인 자성청정심을

완전히 깨쳐서 체득한 다음에

그 자성청정심에 집착하는 일이 없는가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머문다’고 해서 머무는 곳이 있다고

생각하여 거기서 앉고 서고 하는 것으로 알면 이것은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청정함을 확철히 알게 되면

거기에서 모든 것을 수용한다 하여도

청정한 생각도 없고 머물려야 머물 수 없는

무주심(無住心)을 성취한 때문입니다.

 

 

“마음이 공에 머물 때에는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곧 공에 집착한 것이니라.”

 

問 心住空時 不是着空否

答 若作空想 卽名着空

 

공을 완전히 깨치면

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공(空)과

청정함[淨]이라고 하는 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은 말입니다.

 

청정함을 확철히 알려면

일체가 모두 공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8아뢰야식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공한 구경각을 성취해서

진공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절대로 청정을 알 수 없는 것이며,

 

청정을 확실히 알면

진공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청정을 알 때가 곧 진공인 것이니,

진공이 되면 공에도 집착하지 않고

청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거기에 머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이

망상분별의 업이 많기 때문에

어떤 때는 청정이라 하고

어떤 때는 공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이름을 쓰지만

 

그것들은

중생의 업에 따라 방편으로

달리 말한 것이지

그 내용이 다른 데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공이라는 것은

공이라는 생각도 없는 것을

공이라 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공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것은 망(妄)이지 진(眞)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공이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되면

공에 집착한 것이 되고

 

 

 

 

공에 집착하면 진공이 아닙니다.


 

 

“만약 마음이 머뭄이 없는 곳에 머물 때에 머뭄이 없는 곳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다만 공한 생각을 지으면

곧 집착할 곳이 없으니

머문 바 없는 마음을 분명하고 밝게

알고자 하면

바로 좌선할 때에 다만 마음만 알고,

 

 

모든 사물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며

모든 선악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라.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원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함이요,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라

일체의 일에 집착함이 없음을 알 뿐이니,

 

집착함이 없다 함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집착함이 없음인지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함이다.

 

삼세를 거두어 모을 수 없음이

또한 삼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만약 마음이 일어날 때에

따라가지 않으면

가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 없어짐이요,

 

만약 마음이 머물 때에 또한

머뭄에 따르지 않으면

머무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머무는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을

머무는 곳이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느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머뭄이 머뭄에 있을 때에는

다만 사물이 머뭄 뿐이요,

또한

머무는 곳이 없으면

머무는 곳 없음도 없는 것이니라.

 

만약 밝고 밝게 스스로 알아

마음이 일체처에 머물지 않으면

곧 본래 마음[本心]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성품을 밝고 밝게 본다고 하는 것이니라.

 

 

머뭄이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하는 것은

언어로 표현하려고 하니까

‘머문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머무는 곳’이 있어서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머뭄이 없는 곳에 분명히 모든 것을

자재하게 수용하는 것이니

이것은

진여대용인 진공묘유의 머무름이지

결코

생멸과 집착이 있는 머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머뭄에 처소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공空한 생각想을 짓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공空에 집착한 생각想과는 다른

공한 생각空想입니다.

 

앞에서 말한 공한 생각空想은

공에 집착한 분별을 가지고 하는 말이요 여기서의

공한 생각空想이라고 함은

분별과 머뭄이 없는 진공묘유의 생각想임을 우리가 구분해야 합니다.

 

다 같이 ‘있다有’고 하여도

생멸의 ‘있다’와 묘유의 ‘있다’가

근본적으로 다르듯이

 

여기서 공한 생각空想이라 함은

집착이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하고

앞의 공한 생각은 집착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인 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머뭄이 없는 마음이란

진여본심 즉 무념심無念心,

진여자성을 말함이니,

누구든지 머뭄이 없는 마음 즉 진여본심·진공을 확실히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앉았을 때 다만 마음만 알고

모든 물건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며

모든 선악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대주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앉는다’고 하는 것이

행주좌와에서 몸의 자세를 바로 하여

앉음이 아니라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를 깨쳐서 양변을 여의고

정견正見 · 정념正念을 성취함을

‘바로 앉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 돈오입도요문론 강설 중에서 -

'선문禪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각  (0) 2019.08.31
여여如如  (0) 2019.08.31
자연 그대로  (0) 2019.08.29
하나의 일이다  (0) 2019.08.28
자존심은 허망하다  (0) 2019.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