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순간 마음, 몸, 세계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두십시오.
잘 닦인 마음은
평화로운 마음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한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평화로운 마음은
분리의 환영이 없는 마음이며,
존재하지 않는 분리된 자아의 두려움,
요구, 신경증, 걱정에
더이상 봉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때에 따라, 상황의 필요에 따라
좀 더 적극적이거나 덜 적극적이지만,
분리되어 있다는 믿음이 없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평화로운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평화는
억제가 아니라
자유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마음을 닦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닦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은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는 대신,
당신의 본질이 이미,
늘, 방해받을 수 없는 평화 자체임을 아십시오.
이를 분명히 알게 되면,
마음은
가상의 분리된 자아에 봉사하는 대신,
이 본래 평화로운 앎의 현존을
표현하고 봉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 • •
당신인 순수한 앎이
지금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필요한 것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 나, 앎에
무엇이라도 빠져 있거나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생각과 느낌은
어떤 것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참된 자기가 그렇게 말합니까?
우리 자신에게
본래 어떤 부족한 느낌이 있습니까?
우리의 참된 자기인
이 텅 빈 열림에게는
지금 나타나는 모든 것이
완전히 괜찮음을
보십시오.
우리의 참된 자기에게는
‘지금’에서 멀어지고 싶은
티끌만큼의 미세한 충동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나타나든 괜찮은
이 전적인 ‘괜찮음(okay-ness)’에
부여하는 공통된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릅니다.
행복은
몸의 즐거운 감각,
마음의 확장되거나 평화로운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참된 자기의 자연스러운
본래 상태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
그것이 그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평화와 행복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존재’를 아는 앎에
우리가 부여한 공통의 이름입니다.
평화와 행복은
모든 경험의 배경에 늘 있으며,
모든 환경과 모든 조건 속에서
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문화는
행복을,
우리 ‘존재’에 대한 늘 있는 단순한 앎에서
몸의 즐거운 감각이나 마음의
확장된 상태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즐거운 감각이나 확장된 상태는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일시적인 부수 효과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리된 자아의 긴장이 풀릴 때,
몸 안에 막혀 있던 곳이 풀리면서
그로 인해 즐거운 감각의 물결이
몸에 밀려올 수 있습니다.
또는
가상의 분리된 자아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에 봉사하던
일련의 생각이 멈출 때,
그리하여 욕망이 멈출 때,
그런 마음의 긴장과 고착이 해방되면서,
늘 있지만
대체로 마음 아래에 가려 있던
평화가 잠시 보입니다.
마음이 이처럼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올 때,
마음은 다시 찾은 평화로 가득해지며,
그로 인해 확장되거나
평화로운 상태로 경험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런 즐거운 감각과 마음의
확장되거나 평화로운 상태는 오고 갑니다.
만약 행복이
이런 감각이나 상태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늘 왔다가 가 버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짧은 순간씩만 중단될 뿐)
평생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행복 추구’라 부르든
‘깨달음 추구’라 부르든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만약
행복이나 깨달음이
몸이나 마음의 상태와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늘 좌절할 것입니다.
우리는
저항과 추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짧은 순간씩만
평화와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짧은 순간들은
새로운 추구에 자리를 내주면서
점점 더 빨리 사라질 것입니다.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 대다수 사람은
말 없는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
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행복이나 평화, 깨달음이
몸이나 마음의 상태와 상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몸, 마음, 세계는
무엇이든 조건 지어진 대로 하도록
놓아두십시오.
햇빛,
바람,
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의
생각, 느낌, 행위를 만들어 냅니다.
우주 어디에도
개인적인 대상이나 실체는 없습니다.
언제든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이나 당시 환경에 응하여,
딱 알맞은 순간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필요할 때 알려질 것입니다.
• • •
결핍이나 불편함이 없는,
‘지금’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티끌만큼의 성향도 없는
우리 참된 본성의 본래 평화와
접촉하십시오.
‘지금’을
당신의 집으로 삼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집이게 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깊이 갈망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 있습니다.
모두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모든 사랑,
모든 평화,
모든 행복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아는 단순한 앎
(자기를 아는 ‘존재’의 앎)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면
늘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관계에서,
평화를 상황이나 상태에서,
행복을 대상에서 찾는다면,
늘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대상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잠시 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얼마 뒤 상황, 관계, 대상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던 평화, 사랑, 행복은
점차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잃어버린 듯한
그것들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다시 새로운 상황, 관계, 대상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어떤 종류의 대상이나
경험에 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상황, 관계, 경험이나 대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고통은 마음에 주는 메시지며,
통증은 몸에 주는 메시지입니다.
통증이
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해 주는 지성이 보내는 메시지이듯이,
고통은
우리가 자신을 분리된 자아로 착각하고
대상, 상태, 관계를 통해
가상의 자아를
만족시키려 한다고 말해 주는,
같은 지성이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고통은
그저 우리가
행복을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다고,
대상에서 찾고 있다고 말해 줄 뿐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 나 행복은
거기에 살지 않는다.
대상, 상황, 상태, 관계나 경험에서는
나를 찾을 수 없다.
나는 당신 ‘존재’의
친밀함 속에 살고 있다.
나는 당신 ‘존재’의 친밀함이다.
오직 그곳에서만 나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거기에 있으며,
늘 주어져 있으며,
열려 있으며,
알려지기를 기다린다. ”
"순수한 앎의 빛"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