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끊어진 자리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말로 인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말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가장 행복을 나누어야 할 가정이 깨지기도 합니다. 말 때문에 생기는 우리말 속담은 정말 많습니다. ‘어’ 다르고 ‘아’다르다는 말도 있고, ‘말 한마다에 천 냥 빚도 갚는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은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 해버린 느낌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이 속담은 얼마나 말이 소중한지 언어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속담입니다. 아무리 많은 빚이 있어도 말 한마디 잘해서 빚을 갚는다는 것, 이것은 속담에서나 있을 듯한 이야기지만 찾아보면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이야기는 정말 많이 있습니다.
비록 천 냥이라는 큰돈은 아니지만 가벼운 말 한마디가 주변 사람들을 얼마든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반대로 말 한마디 잘 못해서 낭패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싸움은 이 말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부부간, 친구간, 형제간, 직장 동료 간…… 사람 사이의 감정을 일으키는 경우가 이 말의 영향이 무척 큽니다.
말 한마디 오해해서 가까운 사이가 멀어지기도 하고 말 한마디 잘못 전달해서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특히 습관적으로 말을 함부로 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 적잖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무시해도 괜찮으니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말이 나옵니다.
불교수행의 팔정도 중에 정어(正語)가 있습니다.
정어(正語)는 바른 말을 사용하자는 것인데 바른 말은 바른 생각(正念)에서 나옵니다. 불교의 바른 생각은 실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상(實相) 즉,
무아, 무상, 공을 바로보아
그 토대 위에 말을 한다면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사용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함을 안다면 무시하는 말이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바른 언어를 사용하여 바른 계를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어(正語)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언어란 깨달음을 얻기에 불필요한 것입니다. 선종에서 표방하는 말 중에
언어도단 言語道斷
불립문자 不立文字
직지인심 直指人心
견성성불 見性成佛
말이 끊어지고
문자로 나타낼 수 없으며
곧장 사람의 마음을 가르켜
성품을 보아 성불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바른 언어(正語)를 사용한다고 해도 진리를 나타낼 수 없으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진리와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선사들이 간혹 법문 중에 이 ‘토끼의 뿔’ 또는 ‘거북이 털’, ‘돌 여자의 임신’ ‘진흙 소’ 등 이상한 말들을 하는 경우를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하면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선문답을 듣는 것처럼 ‘선사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치부해 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알고 보면 참으로 어이없을 정도로 쉽고, 또 수행자라면 우리 생애를 통해 꼭 알아야할 말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토끼의 뿔’, ‘거북이 털’ ‘진흙 소’ 같은 것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토끼의 뿔을 가진 토끼는 존재하지 않고, 털 가진 거북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이름만 있고 그 실제는 없는 것’을 의미할 때 쓰는 말입니다.
금강경에는 이름만 있고 그 실제는 없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며, 인욕 바라밀도 인욕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입니다.’ ‘불국토의 장엄은 장엄이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입니다.’ 등등, 이와 같은 말들이 모습을 바꾸어 금경경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 내포된 뜻은 하나입니다. 그 말인 즉 다름 아닌
‘무상(無相)’입니다.
무상이란 한자어 그대로 ‘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더 자세히 풀어 말하면 ‘모습’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모습도 없으며,
‘너’라는 모습도 없고,
중생이란 모습도 없으며,
목숨이라는 모습도 없고,
세상이라는 모습도 없으며
우주라는 모습도 없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그 모습과 흔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언어로 표현 할 수 없어 ‘토끼 뿔’이니 ‘진흙 소’니 ‘거북이 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 - 그것이 본질의 세계인데 그 ‘토끼 뿔’을 우리가 늘 상 쓰는 말로 나타내면
‘진여’이며
‘본래면목’이며
‘불성’이며
‘참 자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언어를 떠난 세계인데 굳이 언어를 빌어 표현하려니 그처럼 ‘토끼 뿔’이니 ‘진흙 소’니 ‘거북이 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 사물을 고정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 ‘장미가 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싱싱하고 예쁜 빨간 장미’를 그려냅니다. 그게 언어의 힘 입니다.
그러나 장미는 갓 피워 오른 장미도 있을 것이고,
시든 장미도 있을 것이고,
이파리가 떨어져버린 장미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엄청나게 많은 모습의 장미가 존재하는데
머릿속은 자기가 느끼고 보았던
한 가지 장미만을 떠올립니다.
그게 언어의 힘인 동시에 언어의 모순입니다.
그렇듯 언어는 사물을 고정화 시키면서
사물을 분별하게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언어는 사물의 겉모습만 이야기 할 뿐,
본질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질을 말로서 표현하는 사람은
본질을 호도하는 사람입니다.
본질은
언어가 끊어지고
문자로도 표현 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흔들림 속에 고요함이 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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