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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법신에서 본다면 색(色)은

법신에서 본다면 색(色)은


모습을 떠났으므로 혜안(慧眼)으로도 볼 수 없고, 

모든 행(行)을 떠났으므로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며, 

모든 식이 떠났으므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어떤 상이 아닌 것임으로 아무리 밝은 혜안이라도 볼 수 없고, 그 어떤 행위를 떠났으므로 제법인, 유위법인,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작용과 상을 들어 가지고는, ‘생각이나 식심을 떠났는데 어찌 그 식심으로 헤아려 볼 수 있겠느냐! 그래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라고 하시어, 그 어떤 유위적 6근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스님은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부처의 생각[佛見]이라고 한다” 라고 하시어 어떤 생각으로 보려는 것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을 불견(佛見)이라고 하신다. 

 

유위적인 것은 모두 세속적 차별심에서 생겨난 말이지 그 실상이 없다. 그러니 이 모든 차별심에서 벗어나서 번뇌망상이 다 사라진 곳에서 그 실상이 투영된다고 하시어 무위법이 곧, 부처님의 참다운 보는 것이며 모든 행이 다 이와 같다고 했다. 

 

그러므로 법신에서 본다면 색(色)은 색이나 형상이 있는 색이 아닌 것을 진색(眞色)이라 한다고 하신다.

 

공(空)은 공이나 창공[太虛]이 아님을 진공(眞空)이라 하나, 

색과 공도 또한 약과 병이 서로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공이라 하던, 

진공이라 하던, 

창공이라 하던, 

이 모든 것은 어떤 형상을 나타내는 말인 것이다. 

 

그러니 그 명색에는 어떤 실상도 존재하지 않음을 들어 이것은 중생이 명색(名色)에 물들어 이 색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 욕심은 버렸으나, 아직 색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그 색계마저 벗어나고, 또 나아가 무색계인 무위법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 모든 것이 상대법에서 생겨난 이름임을 자각하여 이 모든 명과 색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방하착(放下着)하라 하셨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둥근 것은 둥근대로 푸른 것은 푸른대로,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꽃은 꽃대로, 다 자기 성품대로 한 점 조작 없이 다 드러나 있는 그대로 영원한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수많은 예를 들어 같은 말을 계속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법계관(法界觀)에서는 색(色)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 없으며, 공(空)에 즉했다느니 공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사법계관이나 이사법계관이나 이사무애법계관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나 이치가 다 그 색이나 형상을 들어 말하고 있지만, 사사법계관의 차원에서 본다면 색이다 해도 색이 아니요, 공이라 해도 공이 아닌 것이다. 

 

그러서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인 것이다. 그럼으로 공과 색으로 나누는 차별적 관계를 떠나서 공과 색이 서로 서로 상입(相入)하여 만상을 드러내는 차원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것이 다 실상이 아닌 진공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이란 경지에서 보면 하나의 이름이지 그 어떤 것도 세울 것도 말할 것도 붙일 것도 없는 것이 된다.

 

마음의 식심 역시 이와 같아서 어떤 마음도 관념이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관이라는 이 모든 것을 다 떠나고 보면, 거기에 무엇이라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할 수 없이 명색을 만들어 차별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 본성이 공함을 여태 일러 주고 계신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고, 혹하지 않는 데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그것을 ‘빠짐없이 배우고 부지런히 생각하며 널리 유포한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벗어나는 도리인 3구 밖으로 벗어나야만 다시 경계나 생각에 이끌리어 수혹이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시어 배우고, 생각하며 널리 유포한다는 것으로 비유법을 들어 그 대경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불계에서 보는 것과 삼계에서 보는 것이 이처럼 다르고, 그 대경이 서로 경계를 이루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계에 혹해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단계나 경계를 벗어나고 보면 거기에 무슨 차별적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 붙을 수 없는 경지임으로 또 이렇게 일러 주신다.

 

깨닫지 못했을 때를 어미[母]라 하고, 깨닫고 나서를 자식[子]이라 하는데, 깨달음이 없다는 생각도 없음을 어미 자식이 동시에 없어짐이라 한다.

미혹에서는 어미라 하고 깨닫고 나서는 자식이라고 하지만 이 역시 차별적 대경일 뿐이다. 

 

그래서 법신에서 본다면, 이 모든 것을 다 벗어난 경지가 됨으로 어미와 자식이 동시에 없어짐이라 하여 법신의 경지는 그 어떤 말로서는 드러내지 못함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럼 법신이라는 것도 말이지 않는가!

소로소로!

 

    백장록 강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