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는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질도, 정신도 같은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앞의 물질 또는 정신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다음 뒤의 현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 이 둘 사이 연관성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의 현상과 뒤의 현상의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다면 말입니다. 세상은 중구난방이 될 것이고, 사람의 정신은 다중 인격 장애와 같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앞의 현상과 관계되지 않고
뒤의 현상이 일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직전에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오래전 과거에 일어난 일도 지금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결과는 연관성을 가지고 조건의 고리에 의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변치 않는 정체성[identity]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 우리의 외모는 마음에 비해 변화가 느립니다. 물질적인 것, 외모 등은 전생에서 이생에 태어나게 하는 업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것은 마음만큼 빨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형과 같은 커다란 외적 조건이 있지 않는 한 외모는 어렸을 때의 모습과 크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것이 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되고, 일체감을 줍니다.
하지만 몸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또한 어릴 적부터 가족 등 일정한 환경 안에서 일관되게 교육받아 온 우리는 정신적으로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느끼기 어려울 뿐, 실제 그 안의 내용은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조건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촛불에 비유하면, 앞의 촛불이 꺼지고 바로 옆의 초로 불꽃이 옮겨 가고, 그 불꽃이 꺼지고 또 옆의 초로 불꽃이 이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 일어났던 정신·물질이 사라지면서 어떤 식으로든 뒤에 일어나는 정신·물질에 영향을 줍니다. 물론 앞서 일어나고 사라졌던 정신·물질이 지금 당장 영향을 줄 수도 있고, 한참 뒤에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 살펴봅시다.
첫째, 앞서 지었던 업은 뒤에 일어나는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과거나 현재에 지은 업은 미래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살생을 저질렀던 업이 있는 사람은 수명이 짧아지거나 다음 생에 악처에 태어납니다. 선한 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좋은 부모, 좋은 음식, 좋은 환경 등의 원하는 대상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둘째, 어떤 사람, 어떤 환경,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흐름이 바뀔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중요한 조건입니다.
셋째, 감각 기능의 상태도 중요한 조건입니다. 만약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면 보는 의식인 안식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뇌가 망가져도 의식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중요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신세계가 바뀌게 됩니다.
넷째, 평소 일으킨 선한 마음, 불선한 마음도 중요한 조건입니다. 일상 속에서 선한 마음을 많이 일으키는 사람은 다음에도 선한 마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불선한 마음을 많이 일으킨 사람은 불선한 마음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조건에 의지하여 앞에 일어난 물질과 정신이 뒤에 일어나는 물질과 정신에 영향을 주고, 그렇게 계속 이어져 오는 것을 ‘삶을 살아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삶을 살다가 수명이 다하여 죽음을 맞이하면 한 생이 끝나고 다시 새로운 생이 시작되며, 그 생에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또다시 새로운 생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한 생, 한 생이 이어지면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이렇게 조건에 의지해서 물질과 정신이 일어나고 사라지며 이어져 오는 것이 삶임을 이해하면 몸과 마음이 순간순간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몸은 끊임없이 세포 분열을 하고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몸을 이루는 세포들이 완전히 바뀌어 지금의 몸과 완전히 다른 몸이 됩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계속 변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대체로 잘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가진
존재에 대한 집착이 매우 심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래,
몸과 마음이 변하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를 일으키는 무언가가 있다는 주장에서
그 무언가는 바로 자아, 영혼입니다.
우리 몸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안 죽는 사람은 없으니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몸과 마음속에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진짜 ‘나’라고 믿습니다.
만약
‘나’ 또는 ‘자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주인이고 주체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 자아가 있다면
이 자아가 마음과 몸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왕의 비유로써 설하셨습니다.
마치 어떤 나라의 왕이 있다면 그 왕은 나라의 백성이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벌할 수도 있고, 잘하면 상을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의 주체인 자아가 있다면 몸과 마음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아는 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므로 ‘몸이여, 아프지 말라.’라고 명령한다면 몸은 아프지 않아야 할 것이고, ‘몸이여, 죽지 말라.’라고 한다면 죽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태어난 존재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몸에는
‘나’라고 할 만한 자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건 역시 영원한 실체가 아닙니다. 조건이 자아나 영혼의 개념으로 이야기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윳따 니까야』 「원인 경」에 “조건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자아가 없는 것인데 무아인 것으로 만들어진 그 결과가 어떻게 자아가 있겠느냐.”고 나옵니다.
많은 사람은 존재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존재 속에 영원불멸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잘못 알고 고집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아 또는 자아라고 생각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이지 실체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원인 경」에 나온 것처럼
‘조건 따라 생긴 법’만 무아인 것이 아니라
‘조건’ 역시도 무아라고 설하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가르침을 설하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명 때문에 의도적 행위가 있고, 의도적 행위 때문에 의식이 있다. …’라고 십이연기를 설하셨습니다. 그러자 외도들은 결국 무명이란 절대적인 원인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며, 그렇다면 무명이 하나의 창조주와 같은 것 아니냐고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무명조차도 조건을 의지해 일어난다고 분명하게 설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명은 번뇌 때문에 생기고,
번뇌가 있으므로 무명이 생긴다.”
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번뇌가 있으면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기는데, 이것은 무명이 절대적인 원인이 아니라 무명조차도 조건 지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원인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일 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다섯 무더기,
즉 물질과 정신의 결합이고,
물질과 정신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명과 갈애인데
무명과 갈애도 무상한 것이고, 괴로움이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인 조건을 의지해서 일어난 존재,
즉 물질과 정신에는 영원한 자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종합해 보면 존재는 물질과 정신의 결합이고, 물질과 정신은 조건을 의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같이 물질과 정신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의 연속이 바로 존재의 삶입니다.
그래서 존재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작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관성을 가지고 앞에 일어난 것과 뒤에 일어난 것의 인과관계로 이어집니다.
이 때문에 나름의 개성과 개체성이 드러나는데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나’ 또는 ‘자아’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개성이나 개체성도 조건을 의지해서 발생한 것이므로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입니다. 그래서 존재는 ‘나’ 또는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면
존재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나’ 또는 ‘자아’라는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실체가 아닌 생각을 통해 만들어진 개념일 뿐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원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착각하여 그것을 붙잡고 ‘나’라고 집착할 뿐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자신이 사라진다고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은 존재하던 ‘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지도 않은 ‘나’가 있다고 고집하는
존재에 관한 어리석음과 집착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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