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문의 종宗과 체體
문
이 돈오문에는 무엇으로 종宗을 삼고, 무엇으로 뜻(旨)을 삼고, 무엇으로 체體를 삼고, 무엇으로 용用을 삼습니까?
답
생각이 없는 것으로 종을 삼고, 망념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뜻을 삼고, 청정한 것으로 체를 삼고, 지혜로써 용을 삼는다.
문
이미 무념으로 종을 삼는다고 말씀하시는데 무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생각이 없는 것입니까?
답
무념이라는 것은 삿된 생각(邪念)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정념正念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
문
어떤 것이 삿된 생각입니까? 어떤 것을 이름하여 정념이라 합니까?
답
있다(有)는 생각과 없다(無)는 생각을 곧 이름하여 삿된 생각이라 하며, 유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곧 이름하여 정념이라고 한다. 선善을 생각하고 악惡을 생각하는 것을 곧 이름하여 삿된 생각이라 하며, 선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정념이라 한다.
고통 즐거움, 나는 것 죽는 것, 취하는 것 버리는 것, 원망하는 것 친한 것, 미워하는 것 사랑하는 것까지 아울러 이름하여 삿된 생각이라 하며, 고통과 즐거움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정념이라 하느니라.
문
어떠한 것이 이 정념입니까?
답
정념이라는 것은 오직 보리菩提를 생각하는 것이다.
문
보리는 가히 얻는 것입니까?
답
보리는 가히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
문
이미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시면 어째서 오직 보리를 생각합니까?
답
다만 보리라고 한 것은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으로, 실로 얻지 못하니라. 또한 앞도 뒤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니라. 가히 얻지 못하는 고로 생각이 있을 것이 없다. 다만 생각이 없을진대, 이 이름이 참생각(眞念)이니라.
보리는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이요,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이니라.
다만 위에 설한 것과 무념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일을 따라 방편으로 말한 것이며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다.
다 한가지로 한 몸으로, 둘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 단지 일체처에 무심한 줄 아는 즉 이것이 무념이니라. 무념을 얻을 때 자연히 해탈한 것이니라.
問
此頓悟門 以何爲宗 以何爲旨 以何爲體 以何爲用
答
無念爲宗 妄心不起爲旨 以淸淨爲體 以智爲用
問
旣言無念爲宗 未審無念者 無何念
答
無念者無邪念 非無正念
云何爲邪念 云何名正念
答
念有念無 卽名邪念 不念有無卽名正念 念善念惡 名爲邪念 不念善惡 名爲正念 乃至苦樂生滅取捨怨親憎愛 並名邪念 不念苦樂等 卽名正念
問
云何是正念
答
正念者唯念菩提
問
菩提可得否
答
菩提不可得
問
旣不可得 云何唯念菩提
答
只如菩提 假立名字 實不可得 亦無前後得者 爲不可得故 卽無有念 只箇無念 是名眞念 菩提無所念 無所念者 卽一切處無心 是無所念 只如上說 如許種無念者 皆是隨事方便 假立名字 皆同一體 無二無別 但知一切處無心 卽是無念也 得無念時 自然解脫
‘돈오문頓悟門’이라는 것은 몰록 깨달아서 부처님이 깨달은 그 자리를 우리들도 똑같이 증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몰록 깨닫는 것이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드러내어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으면 부처님이 깨달은 그 자리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남방의 관법은 소승선입니다. 소승선은 소승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승불교의 간화선, 즉 화두 참선하는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취지가 다릅니다.
남방에서는 물론 소승이나 대승이라는 문구가 없지만,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그 공부방법이나 취지 그리고 깨달음의 극치가 다릅니다.
소승선은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부처님이 깨달은 최고의 대각 자리를 목표로 합니다.
물론 부처님 생존시의 원시불교 시대에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수행을 하긴 하지만, 부처님이 깨달은 대각 자리에 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라한과라도 증득하겠다는 뜻이 농후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등 북방으로는 최고 일승, 즉 부처님 자리를 바로 깨닫는 대각을 지향하는 불교가 널리 퍼졌습니다.
최고의 목표는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각 자리를 몰록 깨닫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중국에서 몰록 깨닫는 돈오문의 방법으로 가르쳐 무수한 도인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와 같이 대각 자리를 바로 깨닫는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화두선, 간화선입니다.
이 화두는 원래는 참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한마디 했을 때 바로 깨달아서 계합이 되는 것입니다.
근기가 여러 가지로 차등이 있어서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부득이 이 문제를 깊이 의심해서 관조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고 했을까?’,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운전하는 이놈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깊이 의심해 들어갑니다.
‘무無’ 했을 때 바로 깨달으면 되는데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근기 따라 차이가 있어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하고 깊이 의심해 들어가는데, 아무리 늦어도 십 년이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관법으로 공부해서 깨달으려 하면 무량 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시간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박에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기간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량겁을 두고 닦아야 할 것을 선종에서는 단박에, 언하에 해 마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무념위종無念爲宗”의 무념無念이라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념은 생각이 딱 끊어져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삿된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념이라는 자리는 나고 죽는 생멸심이 없는 진여자성 자리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 정신세계에는 생멸심이 있고, 바깥의 우주 만유에 나타나 있는 것도 생멸이 있습니다. 나에게 이로운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버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내가 너를 열심히 키우고 투자를 하면 네가 성공해서 부모에게 보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은혜 은恩 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부모를 배반했을 때는 원수 원怨 자로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식이 부모에게 버림받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버리면 원수가 되고, 버리지 않으면 친한 것이 됩니다.
짐승들은 새끼를 키워서 새끼가 자력으로 생활할 수 있게 성장하면 혼자 살아가라고 쫓아 버리지, 키워준 것에 대한 보답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낳은 새끼니까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자력으로 잘 살도록 키워 보내지, 새끼에게 보답을 바라고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은 서로 바랍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바라고 부모는 자식에게 바랍니다. 부모, 형제, 친척이 살아가며 서로 바라고 의지하는 데에서 원은이 생깁니다.
잘하고 못하는 것에 관계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만 해주면 되는데, 나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고 배반했을 때 반드시 문제가 됩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하늘 끝까지 충천합니다. “이놈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대주어록에는 친하거나 원수지는 것에 관계없이 양변의 테두리에서 놀아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면 사랑하고, 싫어하면 미워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삶입니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가지를 떠난 것이 중도의 마음을 취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심원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아주 나쁜 사람이 한 스님을 계속 침해하고 괴롭혔지만 그 스님이 한결같이 친하게 대해줘서, 그 사람이 한 생각이 뒤집어져서 3년 만에 항복을 하고 새롭게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생 동안 스님께 나무를 해서 불을 때고 시봉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정념이라는 자체는 두 가지 양변에서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정념으로 살아가는 이 자리, 즉 공부해서 우리의 자성, 때가 없는 본래의 면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양변이 관계없습니다. 원친 고락 생멸 등에 걸리지 않습니다.
무문 화상 같은 분은
“봄에는 백 가지 꽃이 있고 가을에는 달이 밝고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는데, 한가로움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왜 그리 바쁜가?
여러 가지 일을 마음 머리에 걸어 버리면 이것이 다 사람들의 좋은 시절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지요. 근본 마음자리만 바로 알아버리면 좋은 시절을 알게 됩니다. 바쁜 가운데에도 한가한 도리가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설봉 스님이 대답하시길,
“야, 너의 잠꼬대 같은 말이 무엇이냐?”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암두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작은 고기가 큰 고기를 삼켰느니라.”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금일 좋은 햇볕이 쪼이니 보리가 잘 익느니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면
“달은 다섯을 깨지 아니한다.”
하고 답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무념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모르시겠지요? 공부를 안 하니까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를 하면 왜 모르겠습니까? 이것이 전부 우리의 마음 세계에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의 눈은 고깃덩어리 육안으로, 사량분별해서 식심으로 살아가는 눈이지 지혜의 눈이 아니기 때문에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차원 높은 소리를 백날 들어도 답답하기만 하고 잠이 오고 지겹고 머리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놈이 무너지기 전에는 안 됩니다. 생멸심을 가지면 외짝 눈, 마음 지혜의 눈이 죽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미간백호는 지혜의 눈입니다. 무간지옥까지 우주 대천세계를 환히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이 정문頂門의 눈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옷은 다 떨어져서 구멍이 났고, 몸은 깡그리 말라서 드러났는데, 집이 무너져 누워서 별을 보는 눈이더라.” 하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낱낱이 설파해 줄 수는 없고, 깊이 공부해 보면 나중에 알게 됩니다.
“보리는 가히 얻지 못한다.”
만약 여러분이 공부를 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거나, 대승 진리를 얻었다.”고 하면 대주 선사의 사상이나 부처님과 조사스님 사상으로부터 십만 팔천 리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미 얻지 못한다고 할진대 어째서 오직 보리를 생각합니까?
“다만 보리라고 한 것은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이니라.”
보리라고 한 것도 이름을 붙인 것이니 이름에 속지 마라는 것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이니라.”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1+1=2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만, 부처님은 1+1=2라고 하고서는 그것은 이름이 2라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둘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여기에서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어느 성인이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부처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만이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줄 아는 것이에요.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항상 뒤를 남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취조차 싹 쓸어버려서 흔적이 없습니다. 이 도리를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밥만 먹고 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로 불가득이라 했다. 또한 앞도 뒤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니라. 가히 얻지 못하는 고로 즉 생각이 있을 것이 없다. 다만 생각이 없을진대 이 이름이 참생각(眞念)이니라.”
생각이 없다고 단정하면 단견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없다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얼른 튀어나옵니다. 대주 선사도 부처님 사상에 똑같이 어긋나지 않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념이다.” 하여 ‘무념’이라는 생각에 머물게 되면 부처님의 진리는 꿈에도 보지 못합니다. 그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본인이 공부한 견해에 따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리는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이요,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은 곧 일체처에 무심이니라.”
‘무념’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또 ‘참생각’이라고 세운 것입니다.
‘무심’이 무엇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생멸, 증애, 원친, 취사 등 두 가지 마음이 없는 참된 보리, 대승 진리, 여러분의 진여자성 자리를 이름하여 보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얻을 바가 없으며, 생각하는 바가 없으니 곧 일체처에 무심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심은 취사, 원친, 생멸, 증애의 중생심이 없고, 보리나 진념이라는 것도 세울 수 없는데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름을 붙여 세운 것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알고 보면 똑같다. 중생과 부처가 다르고, 성인과 범부가 다르고, 짐승과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차원에서는 똑같다.
단지 일체처에 무심하다. 이것은 또한 무념이다. 그러면 자연히 해탈이다.”라고 했습니다.
해탈한 것은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벗어났다’는 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기라는 호를 가진 증거 비구니스님이 설봉 스님께 한 말씀 법문을 듣기 위해 절을 하며 참례하니까,
설봉 스님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묻습니다.
“대일산大日山에서 왔습니다.”
“해가 떴느냐, 뜨지 않았느냐?”
“해가 떴다고 한즉 도리어 눈 덮인 봉우리(雪峯)가 다 녹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현기입니다.”
“날로 짜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
“터럭 하나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하고 답하고는 나갑니다.
설봉 스님이 비구니스님의 뒷모습을 보고
“현기야! 네 가사가 땅에 끌린다.” 하고 부릅니다.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까, 설봉 스님이
“실낱같은 것도 걸치지 않았느니라.” 하고 말합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여기에서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현기 스님이 설봉 스님에게 완전히 방망이를 맞았습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바로 알면 ‘자연해탈’이라는 자리를 알 수 있습니다.
대주선사어록 강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