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깨니
서창에 달빛만 비춘다
시고 공중 무색
是故 空中 無色
무수상행식
無受想行識
이러므로 공에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
공은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絶對)이면서도 상대적(相對的)인 모두를 아우르는 중도(中道)이므로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한다.
실체 없는 공이 연기하여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바 로 묘유(妙有)이다.
모든 현상은
연기의 공성(空性)에 바탕을 두고 있어,
생겨나고 사라지거나
깨끗하고 더럽거나
늘어나고 줄어드는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키더라도
근본 바탕은 저 허공처럼 여여할 뿐이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서 이를 바탕으로 연기하며 존재하는 물질[色]의 현상이나 정신적인 의식작용인
수(受)·상(想)·행(行)·식(識)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본래 텅 빈 가운데 실재하는 것이 없으니
무한 가능성이 열리어 있고,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언제 어디서나 인식의 주체로서 그리고 연기의 주체로서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비유한다. 중국의 고사에 한단몽(邯鄲夢)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개원(開元) 19년에 한단(邯鄲)이라는 곳의 어느 여관에서 노생(盧生)이라는 젊은이가 연세가 든 여옹(呂翁) 도사를 만났다.
노생은 도사에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지금 이렇게 가난에 찌들어 곤궁하게 사는 것을 탄식하였다.
도사는 ‘부귀공명이란 덧없는 것이니 그렇게 바랄 것이 아니다.’라며 이리저리 달래면서 일러주었으나 노생이 끝내 긍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사는 봇짐 속에서 베개를 꺼내 주며 ‘이것을 베고 자면 부귀영화를 뜻대로 누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문득 밖을 보니 여관집 주인이 노란 좁쌀로 밥을 짓고 있었다. 노생은 도사가 주는 베개를 베고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졌다.
잠결에 들으니 주막집 문 앞이 시끄러웠다. 사내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는데, 그 중에 한 사내가 소리 높여 노생의 이름을 불러 찾았다. 노생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생은 얼떨결에 인도하는 사람들을 따라가 어느 명문가의 사위가 되었다.
온갖 부귀를 누리면서 사는 동안 부침을 겪다가 벼슬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다섯 아들도 모두 그의 음덕을 입어 지위가 높은 관리가 되어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고, 그는 명재상(名宰相)으로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80이 되어 대역죄를 지었다는 모함을 받아, 포박당하여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렇게 되니 평소에 가까이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온갖 모욕을 주고 그의 처자식들마저도 원망을 하였다.
부귀영화도 부질없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다. 원통하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라 혼자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드디어 망나니의 시퍼런 칼날이 노생의 목을 내리쳤다.
목이 뎅그렁 날아가는 그 순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노생은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목을 만져보니 개미 한 마리가 노생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한바탕 꿈이었다. 주인이 짓던 노란 좁쌀 밥은 아직 채 익지도 않았다. 그때 여옹 도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아직도 장군이 되고 재상이 되는 것이 좋은가?”
노생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여옹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나의 베개를 베고 잠이 들면 소원대로 꿈을 다 이룬다네.”
노생은 여옹에게 큰절을 하고 말했다.
“부질없는 허욕을 버리도록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옹은 베개를 다시 봇짐 속에 넣고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베개를 한단침(邯鄲枕)이라고 하고, 그 꿈을 한단몽(邯鄲夢)이라고 부른다.
『삼국유사』 권3의 「조신조(調信條)」에 나오는 조신(調信)의 이야기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옛날 경주 세규사(世逵寺)의 장원(莊園)이 명주군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조신이라는 사람을 보내어 장원 관리를 맡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인연 맺어줄 것을 남몰래 빌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미 부모님이 정한 배필이 있었다.
그는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법당에서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잠시 졸았다. 꿈속에 갑자기 김씨 낭자가 기쁜 얼굴로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저도 일찍이 당신을 먼발치에서 잠시 뵙고 마음속으로 사모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리움을 못 잊어 몰래 도망쳐 나왔습니다. 어디론가 함께 가서 같이 삽시다.”
조신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러 해 동안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집은 가난하여 끼니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마침내 식구들을 데리고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으며 살아야 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방방곡곡을 헤매다 보니 누더기가 된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명주의 해현령을 지날 때는 열다섯이 된 큰 아이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 부부는 통곡하면서 아이의 시신을 길가에 묻었다. 남은 식구들을 이끌고 그들 부부는 띠를 엮어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 이제 부부는 늙고 병든데다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열 살 난 딸이 동네에 밥을 얻으러 갔다가 개에게 쫓기다가 물렸다. 딸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달려와 쓰러졌다. 부부는 가슴이 칼로 저미듯 아프고 목이 메어 눈물만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닦고 나서 말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수려했고 입은 옷도 깨끗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서로 나누어 입었습니다. 집을 나온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으며 정은 깊고 사랑도 얽혔으니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해가 갈수록 몸이 쇠약하여 병도 깊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남의 음식조차도 빌어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집집마다 걸식하는 부끄러움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아이들을 미처 돌봐 주지도 못하는데 어느 틈에 둘이서 부부의 정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름답던 얼굴과 행복했던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지란(芝蘭) 같은 맹서도 바람 앞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입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짐이 되고, 당신은 나의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지난날 즐거웠던 일을 돌이켜보니 그것이 오히려 괴로움의 원인이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이 되었습니까?
여러 마리 새가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해 홀로 짝을 부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입니다. 따뜻할 때는 서로 찾고 따르다가 차갑게 식어지면 버리고 마는 그런 짓은 차마 인정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며, 헤어지고 만나는 것 또한 운수가 따르는 것이니 이제 그만 서로 헤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신은 아내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을 수 없었다. 부부는 각기 아이를 둘씩 나누어 맡아서 떠나기로 하였다.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나며 말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 터이니 당신은 반대 방향인 남쪽으로 가십시오.”
조신은 나머지 두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못 먹고 병들어 여윈 몸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앞을 가렸다. 앞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그만 넘어져
문득 꿈에서 깨어났다.
법당에는 타다 남은 등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밤이 거의 새서 날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꿈에 한평생 살면서 고생을 다 겪고 나니, 이미 세상일에 뜻이 없어지고 연정을 품었던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 앞에 모신 관음보살의 상을 우러러보니 면구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다음 날 꿈속에 아들을 묻었던 무덤자리를 찾아가서 파 보았다. 그 자리에서 돌로 만든 미륵불상이 나왔다. 조신은 세 번 절을 한 다음에 깨끗한 물로 말끔히 씻어 부근의 절에 모셨다.
장원을 맡았던 책임을 그만두고 서라벌로 돌아가 사재(私財)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세우고 수행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서포 김만중은 불심(佛心)이 깊은 효자로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한글 소설 『구운몽』을 지어드렸다.
우리들이 꿈꾸는 이 세상의 부귀공명은 부질없고 무상한 것이니 그런 꿈에서 깨어나 불도를 닦아 불생불멸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중국 남악 형산의 연화봉에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 대사가 법당을 짓고 법회를 베풀었는데, 가까운 동정호의 용왕도 참석하였다. 법회가 끝난 뒤 육관 대사는 용왕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제자인 성진을 보냈다. 한편 형산의 선녀 위 부인은 여덟 명의 선녀를 육관 대사에게 보내 법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였다.
용왕의 후한 접대를 받고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마침 되돌아가던 아름다운 여덟 선녀와 석교 위에서 만나게 되었다. 성진은 황홀하게 아름다운 여덟 선녀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잠시 희롱하였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아름다운 여덟 선녀에 대한 연정이 일어났다. 출가하지 않고 세상에 그대로 살면서 입신양명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성진은 깜박 졸음에 빠져들었다.
한 생각 어리석은 연정을 품고 세상의 욕락을 생각한 것이 인연이 되어, 성진은 여덟 선녀와 함께 인간세상으로 추방되어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 처사의 아들 양소유로 태어나게 되었다.
양소유는 소년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에 승승장구하여 절도사가 되고, 다시 대원수가 되고 나중에는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그 동안 두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고 여섯 낭자를 첩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여덟 부인과 일가를 이루어 화락한 가운데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어느 날 생일을 맞아 양소유는 여덟 부인과 함께 종남산에 올라가 소풍을 즐겼다. 문득 고개를 들어 멀리 북망산에 묻힌 수많은 영웅호걸의 황폐한 무덤을 보게 되었다.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 양소유는 남해의 관세음보살 도량을 찾아가 불생불멸의 불도를 닦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여덟 부인과 함께 절을 찾아가는 도중 자욱한 구름 속에서 노승을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잠에서 깨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노승은 간 곳 없고 여덟 부인도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높은 누각과 화려한 집도 모두 없어졌다. 향불은 이미 꺼진 지 오래인데 서쪽 창문에 밝은 달빛만 비추고 있었다. 성진이 긴 꿈에서 깨어나자 육관 대사가 말하였다.
“장자가 잠을 자다 꿈속에 나비가 되었는데, 깨어나서는 자신이 나비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비와 장자 중에 어느 것이 가짜이며 어느 것이 진짜인가? 자네 성진과 양소유 두 사람 중에 누가 꿈속의 사람이고 누가 현실의 사람이냐?
『금강경』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꿈이나 허깨비·물거품·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라.’고 하였느니라.”
성진은 다시 찾아 온 여덟 선녀와 함께 육관 대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크게 도를 깨달았다.
어떤 사람이 그림자가 자신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온갖 몸짓을 하며 갖가지 그림자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별별 행동을 다 해보다가 지쳐서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그림자는 그가 가는 곳마다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어디서 몰래 남의 과일을 따먹으려고 해도 그림자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림자는 그가 남몰래 하는 행동도 모두 따라하는 것이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창피한 일, 나쁜 일도 그림자는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림자에게 몽땅 들키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를 떼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도망을 쳤다. 그런데 그가 동쪽으로 가면 그림자도 동쪽으로 따라왔다. 그가 서쪽으로 가면 그림자도 서쪽으로 따라왔다.
그가 어디로 가든 그림자도 그에게 딱 달라붙어서 어김없이 따라왔다. 천천히 가도 그림자가 따라오고 숨이 턱에 차도록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따라왔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 그림자도 함께 걸음을 떼어 옮겼다.
아무리 도망쳐도 그림자는 끝없이 따라왔다. 마침내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는 나무 그늘 아래에 주저앉아 쉬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한숨을 돌린 그가 문득 그림자를 찾아보았는데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불안과 두려움, 미움이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그림자보다 더 지독하게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는 것이다.
우리는 나고 죽음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떨쳐버리려고 한다. 나고 죽음도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림자는 음과 양, 빛과 어두움, 원인과 결과로 만들어진 상대적인 관계의 소산이다.
모든 것을 쉬게 하는 나무 그늘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상대성이 없어진 경지이다. 그러한 곳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쉬고 있으면 그림자도 사라지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사라진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위해 살면
그림자의 노예가 되어 불안과 공포 등 온갖 스트레스가 생긴다. 마음이 쉬고 고요한 가운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림자는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림자는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하는, 그야말로 그림자일 뿐이다. 그림자는 지울 수 없다. 아니 지울 필요가 없다. 다만 그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그냥 깨닫기만 하면 된다.
오온(五蘊)이 본래 공(空)한 줄
조견(照見)하면,
나의 그림자[色]가 없어지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두려움의 수·상·행·식도 사라진다.
그림자는 본래 실체가 없어서, 내가 지른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감응하는 것인 줄 깨달으면 된다.
그러면
내가 그림자의 주인이 되어 살게 된다.
우리의 꿈속에 펼쳐지는 세계와 그 안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속에서 울고 웃지만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 공한 것이다.
오온이 공한 줄 깨달은 사람은 물질적인 현상인 색(色)이나 정신적인 현상인 수·상·행·식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눈을 뜬 사람처럼 꿈을 깬 사람처럼 자신의 길을 미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게 된다.
한단침 높이 베고 홍진(紅塵) 속을 달리면서
인간세상 부귀공명 마음껏 누리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꿈을 깨니
베갯가에 조각달만 차갑게 비춘다.
반야심경/현봉스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