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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내안의 영원

 

모든 것이 다 좋다.

 

삶을 살다 보면 늘 상실을 겪는다. 재산이나 집,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명예나 직업, 몸의 기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깊은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죽어버린다. 

 

내가 누구라고 알고 있는 자아상이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도 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잃은 나는 그럼 누구지?’

 

무의식중에 나의 일부라고 동일화했던 형상이 나를 떠나거나 해체되면 극히 고통스럽다. 이를테면 내 존재의 그물망에 휑하니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내 가슴에도 구멍은 남아있다.

 

그렇지만 고통과 슬픔을 부정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 고통이 거기 있음을 수용하라. 

 

생각은 상실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간다. 두려움, 분노, 원한, 자기연민 등이 내가 맡은 피해자 역할에 수반되는 감정이다. 

 

그러한 감정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 

마음이 지어낸 이야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보라. 

내 안의 구멍에 휘몰아치는 공허함을 느껴보라. 

 

그 낯선 공허함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수용이 일어나는 순간 더 이상 두려움은 없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평화로움이 번져나올 것이다.

 

죽음이 일어날 때, 생명을 담은 형상이 해체될 때 그 사건이 내 가슴에 남기고 간 구멍에는 형상을 여읜 그것, 아직 발현되기 이전의 그것이 빛나고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삶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수용과 명상을 통해서 신의 평화로움이 나에게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체험이란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가. 인간의 삶은 얼마나 잠깐인가. 이 세상에 탄생과 죽음을 벗어난 것, 영원한 것이 있는가?

 

다음을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 만약 한 가지 색, 예를 들어 파랑만 있다 하자. 전 세계가 파랑이고 그 안의 모든 것이 다 파랑이라면 그때 파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랑을 파랑으로 인식하려면 파랑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파랑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무상함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무상하지 않은 것, 잠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나를 비롯해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면 나는 무상을 알 수나 있겠는가? 

 

나를 포함한 모든 형상이 짧은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내가 알고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내 안에 해체되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20세에는 내 몸이 튼튼하고 활력 있음을 안다. 60세에는 내 몸이 약해지고 늙었음을 안다. 나의 생각 역시 20대 때와는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몸이 젊거나 늙었다고 아는 마음, 

내 생각이 변했다고 아는 맑은 마음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 맑은 마음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이다. 

순수의식이다. 



형상을 벗어난 ‘한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잃을 수 있는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깊은 평화에 잠겨 몸에서 빛이 난다. 마치 해체되는 형상에서 무언가 빛이 발현되는 듯이 말이다.

 

때로 매우 늙은 사람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거의 투명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의 눈에서는 광채가 나고 마음에는 더 이상 고통이 없다. 

 

순응을 통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렸기 때문에 생각이 만들어낸 에고적 ‘나’가 이미 해체되어 버렸다. 그들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죽음을 벗어난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만이 갖는 깊은 평화를 찾은 사람들이다.

 

모든 사고와 재난에는 늘 구원의 가능성이 들어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낼 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느끼는 극도의 충격은 의식으로 하여금 형상과 나를 동일시했던 과거의 습관을 한순간에 놓아버리게 하기도 한다. 

 

육체가 죽기 직전 마지막 짧은 순간에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나는 나를 형상을 벗어난 자유 의식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때 돌연히 두려움이 사라지고 한없는 평화로움이 찾아든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은 단지 형상의 해체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죽음은 결국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의 몸이 나라고 생각했던 착각.

 

죽음은 현대 문화가 믿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례적인 일도, 가장 끔찍한 일도 아니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 반대인 탄생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을 때 이를 잊지 말라.

 

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여 임종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벗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지극히 성스러운 행위이며 대단한 특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다가오는 어떤 체험도 부정하지 말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부정하지 말고 느끼고 있는 감정도 부정하지 말라. 

 

내가 사자死子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력감이 들고 화가 나고 슬플 것이다. 그 느낌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여라. 완전히 받아들여라. 나에겐 통제권이 없음을 받아들여라. 체험의 매 순간에 깊이 순응하라. 

 

죽어가는 이가 체험하는 고통과 불편함 뿐 아니라 거기 수반되는 나의 감정에도 순응하라. 

 

그렇게 순응한 의식 상태, 그리고 그와 함께 오는 고요함이 사자에게 큰 도움이 되고 죽음으로의 전이를 용이하게 해준다. 

 

말이 필요하다면 내 안에 있는 고요함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말은 다만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고요함과 함께 축복이 온다. 평화로움.

 

      고요함의 지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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