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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禪門

존재의 근원

 

조견오온개공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은

불과 여섯자로 만들어진 짧은 문장이지만

심경을 향하여 걸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단번에 끌어당기는

강력한 자장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 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 여섯 글자를 줄인다면

오온개공이 되고

그것을 다시 줄이면

공이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그 어떤 것도

그 안에 나라고 할만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하는 것이며

연기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은

그것의 성품이 공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꿈과 같이 무상한 것이라면

실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건이나 현상으로 나타난 것 중에서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남는 것은 전체로서의 존재 그 자체와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현존의식(sense of being)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면서

인식과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순수한 의식이다.

 

조견은

우리의 무지를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중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심경을

현묘하게 해석하려는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야 한다.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조견은

어떤 대상을 환하게 비추어 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심경에서의 조견은

 

내면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통한

인식의 전환을 의미하고 있는 말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외부를 향하여

치달리는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려면


“내가 있다.”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인 물음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찾아가기 위한 모든 시도와 노력을

조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온 五蘊

five skandhas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 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를 말한다.

 

심경은

이 오온이 무상한 것이며

그 어느 것에도 그 안에

영원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온이 무상하다면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도 그리고 세계도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나와 세계가 무상한 것이라면

이 세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양면성을 가지게 된다.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견오온개공은

“나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의 안에

나라고 할만한 주체나 실체가 없다는

진실을 분명하게 깨우치셨다”이다.

 

 

 

몸과 마음은

우연히 나타난 사건이나 현상일 뿐이며

사건이나 현상과 같이 무상한 것은

내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심경이 2500년 동안이나

반야 즉 공을 설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심경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애타게 찾고 있는

그 반야가 심경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반야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반야를 가르켜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한 까닭으로

심경과 같은 경전들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야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반야와 하나가 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 선지식들은 말한다.

 

 

붓다의 입멸 이후

이천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붓다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꼽아 본다면

인도의 라마나 마하리쉬

한 사람을 들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성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반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이며 철학자이고 의사이면서

분석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연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인도의 근대 정신사를 대표하는 두분으로

 

라마나 마하리쉬

(Sri Ramana Maharshi, 1879-1950)와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 1836-1886)를 꼽고 있다.

 

 

마하리쉬가

어느 누구나 자신의 본래성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 반면에

 

다른 한 분인 라마크리슈나는

나라고 하는 에고가 남아 있는 한

진정한 지혜나 자유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아카시아 나무를 밑둥까지 자른다 해도

다음 날이면 새로운 싹이 그곳으로부터

나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체의식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나를

순수한 의식의 명령에 복종하는

심부름꾼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다.

 

몸이란

본래의 나를 행동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존재와 현상세계에 대한

칼 구스타프 융의 생각을 읽어보면

그의 생각이 불교의 사상과

거의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칼 융에 따르면

스스로 있는 절대적 존재는

우리의 생각이 닿지 않는 세계이자

의식을 넘어서 있는 세계이지만

 

상대성이 지배하는 현상세계는

개체의식에 의한 시비 분별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 속에

불교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을

느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칼융도 에고(개체의식)가

진정한 자신(순수의식)을 발견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의식를 넘어선 세계를

찾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이 의식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오직 꿈과 같은 무의식의 작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미리 포기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붓다와 예수 혹은

마하리쉬나 마하라지와 같은 성인들의

지혜와 사랑을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우리에게 부과하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을

크게 줄여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와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마치 해바라기처럼 반야의 빛을

따라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로

우리의

눈빛은 맑아지고 감정은 자비로워지며

행동은 단순하면서도 지혜로워질 것이다.

 

 

 

태양과 같이 거대한 불빛 하나가

천지를 환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조그만 호롱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금 서 있는 발 아래를 밝힐 수 있다면

 

세상의

그늘진 구석이란 구석은

모조리 사라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나를 찾아가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수행을 하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순수한 의식의

자체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마하리쉬의 말씀에 따르면

순수한 의식을 찾아가는 방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개가 자신의 주인을 찿아갈 때의

유일한 단서는 주인의 냄새인 것처럼

내가 나의 진정한 실체를 찾기 위해서는

 

“내가 있다 ”라는 나의 현존의식을

그 단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누구인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마하리쉬보다 한 세대가 늦은 마하라지는

   두 분 모두 정규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붓다의 경지에 올랐고

   가르치고 있는 수행법도 거의 유사하다

 

오직 “내가 있다.”라는

나의 존재의식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수행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집과 친구들을 떠나 산 속의 암자에서

경전을 읽고 성찰하며 수 년간 참선을 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맑게 바라본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들어온

우리의 눈을 번쩍뜨이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꿈이나 환幻으로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내가 있다”라는 나의 존재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나의 몸과 주위를 둘러보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인식의 주체는 인식의 대상보다

앞서 있어야 하므로

의식이 몸보다 앞서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의식은

감각적인 삶에 미혹되면서

몸을 자신의 주체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마하리쉬는

몸과 마음을 통하여 작용하고 있는

내가 실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비우기만 하면

 

 

그 즉시

깨우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를 찾아가는 내가 사라져야

비로소 그 탐구가 끝이 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인 공을 안다는 것은

공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공과 하나가 된다는것은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있는

무엇을 찾아내어야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다.

 

예술적인 탐구이든

철학적인 탐구이든

종교적인 탐구이든 모든 탐구 행위는

탐구하는 자가 사라져야 완성이 된다.

 

그러므로 반야는

반야를 탐구하는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일이다.

 

 

 

반야는

반야가 반야를 찾아가는 반야 자체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 시詩,반야심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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