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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현실은 어느 순간 존재하다가 

그 다음 순간 사라지고,

결국 나중에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이미’ 실재한다. 

이것이 근본적 깨달음의 핵심이다. 

 

 

 

그것을 영적 깨어남, 깨달음,

혹은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는 있지만,

일종의 은총으로서 경험한다.

 

근본적 깨달음을 

늘 은총으로서 경험하는 이유는 

그것이 저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은총이란 ‘수고 없이 얻은’ 좋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었던 걸 떠올려보라. 우리는 은총이 일어나도록 할 수 없는데, 이런 생각을 깨달음에 적용하면 이해하기가 까다로워진다. 

 

우리의 행동이 은총과 아무 관련이 없다거나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순간이나 계시가 나타나는 순간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실재 자체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이다. 

 

실재의 깊은 비밀이 밝혀지면, 

모든 존재 안의 모든 것이 

 

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것을 ‘상호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깨우침의 은총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실재의 본질, 

 

있음의 본질이다.

 

우리는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존재이며 우리의 자아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재와 마주치면 그것을 불성, 그리스도 의식, 무한, 영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데, 

 

나는 이 맥락에서 실재를 ‘영spirit’이라 부른다. 영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포함해서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하는 모든 순간은 영의 현현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잘 들어맞는다. 

 

우리의 행동이 그 깨달음과 관련이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의 행동이 ‘직접’ 은총이나 깨어남을 일으키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다. 

 

영적 추구를 하는 것과 자기 인식, 혹은 영적 깨어남이 일어나는 것 간에는 직접적인인과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한 순간이 

전 우주에서 지금 일어나거나 

과거에 일어났던 다른 모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행동 및 영적 수행과 영적 깨달음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면 ‘2+2=4’처럼 그 요소들을 깨달음에 이르는 공식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반대로 우리의 행동이 깨어남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이원론적인 생각도 사실이 아니다. 이는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깊은 깨어남에 의해 경험하는 것은,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이 일어나는 데 관여한다는 것이다. 

 

내가 “비이원적 인과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의미이다. 이 말은 지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는 역설이지만, 보다 깊은 곳에서 보면

 

— 선禪에서 말하듯이 

반야prajna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 —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삶과 은총으로 다시 돌아온다. 영적 깨어남의 은총만이 아니라 모든 은총의 순간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이를 알아차릴 때도 있고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은총은 항상 전체의 일부이다. 

 

 

순간순간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의 산물이다. 

 

 

이는 어떤 한 순간도 특별하게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순간이 영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깨어남이 밝혀주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러한 관점과 은총을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스물다섯 살쯤이었고 대단히 활기차고 의욕적으로 깨달음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원하는 것들을 구하듯이 깨달음을 구했다. 굳은 결심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깨달음을 뒤쫓았다. 그 노력은 대부분 명상이었는데, 명상을 하면 많은 의구심과 많은 질문이 생겼다. 책도 상당히 많이 읽었지만, 그보다는 창조적 열망을 탐색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모으려 했다. 

 

나의 돌파구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했지만, 나 자신과 삶을 다르게 인식하는 길이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느꼈다.

 

그런 식으로 깨달음을 구하고 명상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인식의 문이 열렸다. 가장 놀라웠던 건 

 

 

이미 실재의 본성이 

항상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찾고 있었던 실재가 

이미 여기에 계속 있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실재는 늘 여기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바로 실재’였다. 

 

 

여기서 ‘나’는 

에고 혹은 인격이 아니라 

깨어난 실재 자체인 

‘나’였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나’인 줄 알았던 나 자신으로부터 

깨어났다. 

 

이것이 깨어남의 놀라운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이 되어 영적 돌파구를 향해 분투하고 있는데, 

 

그 돌파하려는 사람이 

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실재와 깨달음을 뒤쫓고 있었는데, 

내가 항상 그것이었다. 

내가 그 실재였고, 

내가 그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명상 수행, 추구, 경탄, 호기심, 독서, 글쓰기, 그 밖의 다른 것들같이 내가 했던 것들이 그 명쾌한 순간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일어난 게 내가 노력한 덕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그 순간을 일으킨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실재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실재를 직접 일으킨 건 아니지만, 

내가 한 모든 것은 

의식 안에서 깨어나고 

발생하는 것의 표현이었다. 

 

보다 깊은 실재가 ‘이미’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처음에 영적 노력 자체와 열망으로서 우리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수행을 하게 된다. 

 

그 열망이 깨달음의 결실이나 깨달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이 의식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열망이 없을 것이고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큰 영향을 미친다.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간접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적 충동은 

 

깨어난 의식이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식이나 깨어남의 깊은 순간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놀라운 점은, 

 

여기서 우리가 이미 우리였던 어떤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우리 아닌 다른 것인 줄 알고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치 실재(혹은 불성, 깨어남, 깨달음)가 지금 이대로의 우리가 아닌 다른 것인 양,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인 양 실재를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무심코 실재를 피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추구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이미 항상 사실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바로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알아차림, 

밖을 내다보는 알아차림, 

 

눈으로 본다는 알아차림, 

주변 소리를 듣고 있다는 알아차림 등, 

 

 

우리가 알려고 하기 전에 그 알아차림을 인식하는 것이 근본적 실재로 가는 관문이다. 

 

그 알아차림이 

곧 무한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그 알아차림 자체가 알아차린 무한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더 현존하려 하는 알아차림 수행을 하는 것은 좋다. 그 수행에는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것이다. 

 

 

 

주의력을 향상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 자체의 본성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우리가 경험을 하든 하지 않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우리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항상 여기 있으며, 

항상 여기 있는 유일한 것은 

알아차림·의식이다. 

 

 

그것은 

모든 경험 안에 있고, 

모든 보이는 것, 

소리, 

냄새, 

맛, 

감촉 안에 있다. 

 

우리가 보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인식하는 어떤 것도 제거하려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제거하려 하는 것은 

대상을 바꾸려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대상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자기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대상과 알아차림의 대상에 갇히기를 포기해야만 하고, 알아차림이 다시 자신을 인식하게 해야 한다. 알아차림은 자신을 인식할 때 열려 있고, 광대하고, 텅 비고, 주의 깊다.

 

언제든 알아차림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바로 알아차림 그 자체라는 걸 

인식할지도 모른다. 

 

알아차림이 

모든 경험의 근거라는 것과, 

경험이란 그 궁극적인 존재의 

근거가 드러나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림이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이 드러나는 것이고, 

알아차림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말일 뿐이지만, 이것이 조언이 되어서, 알아차림의 본성 안에서 쉬면서 동시에 추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무엇을 ‘추구한다’는 것은 

알아차림 안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기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추구한다는 것은 미래의 일이고, 

현재에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직접적인 가르침이든 

실재의 본성을 직접 가리키는 것이든, 

미래를 단념하고 있다. 

 

다른 때에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것을 

추구하기를 단념하기 때문에,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본성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실재의 본성이 변함없기 때문이다. 

실재는 항상 여기 있으므로 

어떤 상태도 괜찮고, 

어떤 경험도 괜찮다. 

 

영의 밖에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더 좋은 순간이나 

더 좋은 상태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현재 순간으로 깊이 들어갈 때, 

 

모든 순간이 

알아차림의 빛, 

의식의 빛으로 

넘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알아차림으로 계속 깊이 들어가면, 

소위 

‘세상’이라는 것은 생각일 뿐이고, 

알아차림의 표현이자 

영의 표현임을 인식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은 

우리가 현재의 알아차림에서 편히 쉴 때 

일어난다. 

 

깨달음은 이처럼 단순하다. 

 

길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길이다. 

다시 현재 순간의 본성으로, 

알아차림으로 깊이 들어가려는 소망을 가지는 것은 은총이다. 

 

그 소망은 어디에서 왔는가? 

기꺼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궁극적인 은총은 

 

매 순간이 은총이며 

 

그 자체가 기적임을 아는 것이다. 

 

 

 

순간순간을 

그렇게 경험하는 것은 선물과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기에 자리 잡고 

우리의 존재의 본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