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이
당신을 미워하거나 혹은 당신에게 해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였다고 당신이 생각하였을 때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보자.
당시 당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회상할 수 있는가?
아마 당신은
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그 사람을 보았을 때
혹은 마음에 떠올렸을 때
당신의 마음에 나타났던
생각과 느낌을 반영하라.
그 사람에 대한 감각이
적이라는 존재로 굳어지고
실제로 느꼈는지를 회상할 수 있는가?
이제 사실은 그 사람이
당신에게 해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이 알았을 때를 회상하라.
잠시 동안
당신이 느꼈던 것과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바뀐 것을 곱씹어보라.
짧은 순간에
당신의 적이
당신과 중립적인 사람
혹은 당신의 친구로 바뀌었다.
현실에 대한
당신의 지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는가?
첫 번째 현실은
당신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한
당신의 적이었다.
당시 당신의 느낌은
처음 지각으로 인해 생긴 화, 분노
혹은 피해망상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 환상이 깨졌을 때
모든 것이 변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지각했던 방식,
그리고
당신이 느꼈던 것이 모두 변했다.
무지는
한순간에 떨쳐졌다.
이것이
“봄이 행이다”의 의미이다.
이것은 심오한 원리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통 하고 있는 일의 방식과
아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삶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것은 좋지 않다”라고 생각했을 경우
만약 그들이 행복하려면
그 상황을
수정해야만 한다는 원리로 일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에고를 적으로 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에고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성적 맥락에서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에고를 제거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에고 그 자체보다
더 큰 문제의 존재로 귀결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통찰 접근법은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바로 사물이
이 순간 나타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새끼줄을 뱀으로 보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수정하거나
해야 할 것은 없다.
다만
새끼줄을
새끼줄로 보면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착각에 빠져 있는
우리의 지각을 놓아버릴 수 있는 힘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짧게 말하면
우리가 진실을 보기 위해
꼬여 있는 새끼줄이 있는 방의 전등을
어떻게 켜느냐 하는 것이다.
대답은
통찰 수행에 놓여 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행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수행은
기존의 지식에 새로운 정보를 보태는
지적인 학습 방식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직접 관찰하는 것에서 오는
이해에 기초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지혜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는
착각의 방식에 도전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착각에 빠진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지탱하고 강화하는
심리적 기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것들은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보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일에
용기를 내어 작동하고 있는
보다 미세한 과정을 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이 자기중심적 실체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자기중심적 실체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감정적 에너지를 확인할 것이다.
이 도전이
변화를 원치 않거나
안락 구역에서 이동하기를 원하지 않는
무지의 관성을
타파할 것이다.
"마음챙김과 통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