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면
설(說)이 통(通)하고 급심(及心)이 통하면
여일(如日)이 처허공(處虛空)하리라.
말하는 것이 통하고 또 마음이 통하면
해가 허공에 있는 것 같으리라.
설통(說通)이란 무엇인가?
개도 소리를 내고 닭도 소리를 내지만 개와 닭의 소리는 다만 소리의 가지가지 종류만 있고 뜻을 품어 간직하지를 못 한다.
서로 알아들어 종(宗)을 삼는 것이야 같지만 사람이 하는 말처럼 문자로 전환되거나 보편적 기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은 뜻을 전하므로 개나 닭으로부터의 구별됨을 얻는다. 즉 말하는 소리가 뜻을 가진 것이므로 ‘음성으로 설하는 바’라고 부른다.
헌데 이 ‘뜻’이라는 말이 문제다. 왜인가?
말과 소리에는 본래 뜻이 없고
뜻에는 소리가 없는 것이로되,
소리를 실어 나르는 뜻이요, 뜻을 머금는 것이 소리인 까닭이다.
뜻에 의지하고도 소리를 잊으면 뜻이 도리어 죽고,
소리에 의지하노라 뜻을 살피지 못하면 사람을 잃는 까닭이다.
따라서 소리와 뜻을 모두 갖추어 막히거나 궁색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법을 삼는 바이다.
음색(音色)은 소리요, 언색(言色)은 뜻이라 이것은 일정한 형상을 표출하여 내기에 색(色)을 의지하지 말라 이르시었다.
의미에서 마음을 찾는 것은 죽는 길이요, 마음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사는 길이다.
‘설통(說通)’이란 막힌 곳을 뚫어 주는 법문이므로 문자나 소리에 쫓아가지도 말고 뜻을 찾아 헤매느라 도리어 마음을 잃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을 알아채도록 하고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니 이미 없거늘 ‘없다’는 말도 없음을 알라.
없다는 말은 없다는 뜻도 아니고 그 소리를 듣고자 함도 아니니 다만 ‘없다’는 말이로되
마음으로 들으면 골수(骨髓)를 얻을 것이지만 글자나 소리로 쫓아 구하면 사람도 말도 다 잃게 된다.
‘심통(心通)’이란 무엇인가?
보통 마음이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식(識)이 복잡하게 서로 엉키어 부둥켜 안기 때문이니
의(意) 없는 눈이 없고 귀 없는 마음이 있을 수 없다. 이름하여
‘나라는 물건’으로 부르기도 하고
자아(自我)라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것이므로 심(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 6식은 이름만 있지 숫자는 없는 것이며 바꾸어 다시 말하면 숫자만 있고 이름은 본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을 볼 때 형태, 소리, 냄새 등 모두를 한꺼번에 같은 물건이 하나의 작용으로 받아들일 뿐,
내가 먼저라거나 네가 먼저라는 순위도 없고 동시에 상하와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
심(心)은 6식이요,
의(意)는 7식이고,
식(識)은 8식으로서
의(意)와 식(識)은 숨어있는 역할인데 6식인 ‘나’와 7식, 8식 숨어 있는 것까지 통칭하여
‘우리’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가장 선적(禪的)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밥을 먹는 놈이 나인가? 내가 밥을 먹는가?
이는 밥을 먹는 놈이 내가 아니요 내가 밥을 먹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니,
도리어 먹는 놈은 없는데 내가 밥을 먹는다고 고집하면 밥을 먹는 놈이 없게 되고,
다 같은 이치라 하여 느슨히 풀어지면 세상 이치가 한 이치인 것까지는 옳으나 하나하나의 실체를 잃고 말게 된다.
하나를 고집하면 부분과 다양성을 잃고
개체를 주장하면 한 마음, 한 이치를 알 수 없 게 된다.
‘나’라는 말에 쫓아가면 세상을 잃고
세상을 쫓아가면 마음을 잃는다.
실체로서의 육체가 없고
마음이라는 실체도 따로 있지 않다.
무념법은 태양에 비유된다. 태양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허공 그 자체는 밝지도 어둡지도 아니한데 밝을 때도 있고 구름에 가리어 어두울 때도 있다.
해가 허공에 있는 것과 견성법(성품 보는 법) 이 왜 같은 것일까?
해에는 “빛을 비추어 준다”는 말도 없고 “일체 생명을 거느린다”는 마음도 내는 일이 없이 모든 것을 비춘다.
그래서 무념법은 태양이며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며
[여일처허공·如日處虛空],
이는 해가 허공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요, 허공이 해에 의지하지 않는 것과 같다.
견성법에서의 법(法)은 진리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자성자도(自性自渡)라, ‘내 성품은 내가 건넨다’는 말이다.
이는 본래 저절로 이룩되는 일이며, 이미 이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스스로 탐진치 번뇌에 가리어짐을 입나니,
이 또한 저절로인 것이라
본성은 선악을 판단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그 해석을 모르고 번뇌와 보리의 구분을 본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간을 초월하려면 대시(對示)법을 초월하라.
대시법은 크고 작고, 밝고 어두움으로써 대조를 이루어 세간에서 싸움이 일어남이다.
사바세계는 이 대립의 존재뿐이다.
세상을 탓하는 것은 무념의 한 법을 모르기 때문이니
세상에 무슨 탓이 있을 것이며
마음에 무슨 잘못이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제 성품만 보면 일체법에 두루 자재(自在)하여
허공의 태양처럼
유유하고 자적하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품보는 법을 전하다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