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송無相頌
본래 모양이 없다고 이르지만
첫째는 근본실체가 본래 없기 때문이요,
두번째에는 상(相)을 보는 나마저도 없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 하는 경우가 있다.
밖에 모양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은
‘나’라는 놈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는 과거 경험에 의지하여 밖에 없는 실체를 ‘나’라는 놈이 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송의 근본이치가
무념(無念)이요,
무위(無爲)이며
무주(無住)라 이른 것이다.
육조 스님께서 《법보단경》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사바세계를 대시법(對示法)이라 이르고 있다.
즉, 일체가 한결같이 쌍을 이루어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는 고로,
긴 것이 있으면 짧은 것이 있고,
밝은 것이 있으면 어두운 것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고,
맑고 탁하고, 승과 속이 있고
큰 것과 작은 것,
생과 멸 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대칭구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또한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나라는 말도 붙지 못한다.
부처님 세계는 이치의 세계이며 귀납적 무념이지만,
세상(사바세계)은
사상(事相: 일과 모양)의 세계이고
보는 것에 따라 따지기를 좋아하여
옳고 그르고, 예와 아니오 등의 양분법으로 나누어 상을 만든다.
이 세상에는 축생, 아수라, 중생, 아라한 등이 많으나 결국에는 부처와 중생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없으며, 없다는 것도 결국 ‘하나’라 하나가 있으면 둘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처가 있으면 중생이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다 한 것이다.
육조 스님께서 “모름지기 무상송을 각각 외우도록 하라.”고 하신 것은
첫째, 중생과 부처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요, 명(名)과 상(相)이 심(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요,
심에 중생과 부처가 없기 때문이요,
무상(無相)이라는 말이 사바세계를 치유하는 말이 아님과 동시에
부처의 세계를 일컫는 특정한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으로 마음을 일컬으며 명상(名相: 이름과 형상)이 없는 생각으로 생각[思念]을 닦아 나아간다 이른 것이다.
즉, 사유수(思惟修)이다. ‘사구(死句)’라는 말이 있거니와, 뜻과 의미로 내뱉기만 하고 마음을 살리지 못하니 죽었다 이른 것이요,
비록 말과 소리는 같으나 이미 말과 소리를 여의었고
모양이 없으며 뜻글이 없되 일체의 생각을 실어 나르기 때문에
활구(活句)라 이르는 것도 이 까닭이 아니겠는가.
즉, 공들여 나아가는 것이 또한 외우는 것이니, 죽은 말을 외우면 소리와 뜻은 있으나 마음을 곧바로 실어 나르지 못하는 고로 죽은 염불이 라 하고,
소리로써 소리를 관하여 이미 뜻을 넘어서면 마음은 명상(名相)을 쫓지 아니하므로
‘송취(誦取)’ 즉, 마음으로 내는 소리라 이른 것이다.
여러 부처님, 조사님들과 천하의 일체 선지식 이 이르시되
다만, “공들이라”하신 것은
이와 같이 소리만 내어 외우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살펴 물어주고 돌이켜 관조(觀照)하기 때문이다.
육조단경 자성 보는 법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