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시詩, 심경

竹隱죽은 2019. 7. 30. 22:02





시詩,

심경

 

한 수행자가,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는 청보리밭 길을 가시다가


나라는 것은

선운사의 동백꽃같이 붉은 무지의 향기에 취해

삶이라는 연극무대 위 모퉁이를 서성이는 엑스트라 배우이므로


풀잎 끝에 달려 있는 아침이슬이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라일락꽃 향기처럼

다만 무상한 것일 뿐이라는 앎을

깊은 침묵 속에서 명상하시었다.


그리고

바람을 이고 가는 민들레 하얀 씨앗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말씀하시었다.


그대여!


이 세계는

저 먼 하늘 뒤에 사는 침묵이

의식의 빛으로 드러나

자신의 꿈과 사랑을 그리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연기緣起하는 것이며

연기緣起하는 것은 무상하여

그 안에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한다.


그대의 느낌이나 생각, 행위, 그리고 인식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대여!


의식이라는 실에 매달려 있는 이 세계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실체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진실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의 이름과 형상으로

그대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대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으므로


몸과 마음이

그대의 실체라는 믿음은

오솔길 위에 떨어진 밧줄을 뱀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착각일 뿐이며


나는

나를 알지 못하는

순수한 의식의 바다로서


그 위에서

세계가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


모든 것이 나이면서 나의 것이며

모든 것의 시작의 앞에 그리고 끝의 뒤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대여!


몸과 마음이 나라는 생각이 바람처럼 사라져

텅 비어있는 자리에는

이름과 형상이 없고 느낌도 없으며

생각도 없고 행위도 없고 인식조차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의식도 없다.

바라 볼 대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접촉도 없다.


그러므로

눈 앞에 드러나 있는 세계로부터

무의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무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눈을 가리는 무명이 있다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라는 것이 본시 없다는 것이다.


늙음과 죽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늙어 죽는다는 것이

있다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것이 본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 역시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고통이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도 없으며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대가 찾고자 하는 지혜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얻을 수 있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지혜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이라는 필름을 통하여

그대 자신위에

그대의 사적인 감정과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에 그대를 가두어 놓고 있으므로


몸이라는 형상과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내가 있다는

거친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욕망과 두려움은 침묵의 빛으로 산산히 부서지고

영원한 자유와 행복이라는 씨줄과 날줄이

그 자리에 그대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깨우친 사람이란

깨우침이 그를 통하여 드러나

모든 것과 하나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진실한 진언이요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부르는 진언이며

가장 뛰어난 진언이어서


나라는 것은

욕망과 두려움이라는 물결에 따라 춤을 추는 한 다발의 습習일 뿐이라는

진실을 절로 드러나게 하므로


그때는 그대가

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지혜를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대여,


하룻밤의 꿈결같은 사랑이여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에 정처없이 너울대는 촛불이여

 

아쉬움과 서러움에 자꾸만 눈물나는

그 작고 초라한 꿈에서 깨어나


이제는 그대가 그대의 사랑 속에서

그대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땅으로


가자

어서 가자


물안개 피어나는 저 강을

노저어 가자.


카테 카테 파라카테 파라삼가테 보디 사바하

gate gate paaragate paarasamgate bodhi svaaha.

 

   시詩, 반야심경/문도환 중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