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차림 자체
대개 우리는 무의식중에
“내가 알아차린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아차리는 사람이며,
알아차림은 나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차리고 있는
‘나’라는 어떤 개인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추정을 명상하듯,
고요히, 단순하게 조사해 보면,
알아차림은 있지만,
알아차리고 있는 ‘나’ 개인을
실제로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나’라는 개인이
알아차리고 있다는 가정은
마음이 배워 갖게 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어,
누가 알아차리고 있는지,
무엇이 알아차리고 있는지를 찾아본다면,
‘그것’이라는
개체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더 많은 것을 알아차릴 뿐이다.
알아차리고 있는
‘나’ 개인은 없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깊은 탐구를 통해
계속 우리의 정체성을 빼낸다.
우리가 무엇이 아닌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 느낌, 개성, 에고, 몸, 마음으로부터
빼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 경험의 외적 요소들로부터 빼내어
그것의 본성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우리가 알아차림 자체로 돌아가면,
곧바로 우리는
“내가 알아차리는 사람이다.”
라는 근본적인 가정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정을 탐구한다.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가정을 조사해 보면,
우리는
알아차리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번번이 발견한다.
알아차리는
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알아차림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는 개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정확히 바로 이 순간,
우리 자신이
바로 알아차림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알아차림이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터무니없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자기의 생각, 자기의 느낌,
자기의 믿음, 자기의 에고,
자기의 몸, 자기의 마음과
동일시하는 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자기 자신을
그러한 것들과 동일시하도록 배웠다.
하지만
탐구를 하다 보면
우리는
생각 이전에,
개성 이전에,
믿음들 이전에
어떤 무엇이,
우리가 알아차림 자체라고 부르는
어떤 무엇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런 탐구를 통해서
알아차림 자체가
우리 자신이라는 통찰이
섬광처럼 번쩍일 수 있다.
우리가 알아차림 자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몸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에고도, 개성도, 믿음도,
다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인간적 자아의 이 모든 외적 요소들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있을 뿐이다.
몸과 마음, 믿음과 느낌이란 알아차림이
입고 있는 옷과 같고,
우리는 이러한 옷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동안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며,
당신의 믿음들이 아니며,
당신의 개성이 아니며,
당신의 에고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당신은 그런 것이 아닌 어떤 것이며,
내면에, 당신 존재의 가장 깊숙한 핵심에
늘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우선 ‘알아차림’ 자체라고 부르고 있다.
알아차림은
당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며,
훈련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며,
알아차리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 통찰의 혁명적인 특징이다.
알아차림은
진정한 당신 자신이며,
당신 존재의 본질이다.
알아차림은
당신 자신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이기도 하다.
"아디야샨티의 참된 명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