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알 수 없는 것

竹隱죽은 2025. 3. 24. 16:45



자유롭고 싶은 충동에는
원래 불안이 내재합니다.


자유롭고 싶은 충동은
마음 바깥에서 나오는데,
이 때문에 마음은 심한 불안을 느낍니다.

대부분의 영적 구도자들은 이 불안감을 벗어나기 위해 멀리 있는 영적 목표를 추구하며 노력합니다.

그런 식으로 불안감을 회피합니다.
불안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유롭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근원인

‘알 수 없는 것’
(the Unknown)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에고는 그것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영적 구도자를 창조해 냅니다.

그것은
매우 지능적인 마음의 장난이자
쇼이며 환상입니다.


질문
그럼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나 마찬가지로군요.

대답
자유롭고 싶은 충동은 마음 바깥에서, ‘나’의 바깥에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은, 나는 이 충동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찾는 행위를 통해서 이 광대한 ‘알 수 없음’과 이 불안감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자유롭고 싶은 충동은 그들을 그 너머로 데려가는 대신, 하나의 분리된 자아라는 느낌을 단단하게 할 뿐입니다.

찾는 행위는 일어납니다. 하지만 ‘찾으려는 대상’과 분리된 ‘찾는 자’는 순전히 마음의 창조물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찾는 자’가 아니라
‘찾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참나입니다.


질문
‘찾는 자’라는 환상은 자유롭고 싶은 충동에 대한 위장된 형태의 저항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자기의 바깥에서 찾지 마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찾으려는 것입니다.
고요히 있으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올 것입니다.

질문
그 충동에 대한 저항이 없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싶은 충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까요?

대답
중요한 것은 자유롭고 싶은 충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충동은 의식이 내 안에 심는 하나의 씨앗과 같습니다. 당신이 할 일은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

자유롭고 싶은 충동이 있을 때
가장 진실하고 성숙한 반응은

그저 멈추고,
가만히 있으며,
쉬면서
그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멈추는 것에 절대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찾는 자’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찾는 자’가 아닙니다.


생각, 감정, 소리, 냄새 등의 현상들, 즉 앞에 있는 풍경들보다


고요한 배경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앞에 있는 풍경들에,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참나는 배경에서 발견됩니다.

참나는
모든 현상이 나타나는 근원이자,
가장 미묘한 느낌과 경험들로부터
거친 물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이 드러나는

바탕입니다.

가만히 쉬면서
이 배경으로 머물러 있을 때,
당신의 참나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그저 참나에게
자기를 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당신이 참나에게 내주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 생각은
그 침묵에서 나오므로,
당신은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생각을
침묵에게 되돌려 줍니다.

 
질문
저는 구도자로 굳어지기 이전의 찾는 행위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유롭고 싶은 충동은 신체에 강렬한 느낌을 일으키는데, 이런 느낌을 피해 물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 같습니다. 마치 열기가 너무 뜨거우면 물러나듯이 말입니다. 그 충동에는 또한 우리를 움직이게 하려는, 또는 아마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진화하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움직이려는 자연스러운 성향과, 그런 충동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정지해 있어야 할 필요를 조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
자유를 향한 충동이 결실을 맺는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당신이 할 일은 그 열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 불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물러나려는 어떠한 성향에도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요리되기를 원한다면 오븐 안에, 자유롭고 싶은 충동의 불길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질문
짧지만 극심한 두려움이나 오래 지속되는 두려움을 경험한 수행자들이 많습니다. 제 경우에는 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는,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말하자면 ‘알 수 없는 것을 들여다볼’ 때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우리 자신이 ‘그것’임을 알아볼 때까지 그 ‘알 수 없는 것’을 견뎌 낼 수 있을까요?


대답

“누가 지켜보는가?”

라고 물어보십시오.
지켜보는 자가
‘텅 비어 있음’(空) 자체와 다릅니까?

질문
아뇨.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대답
이 점을 알아차릴 때,
그 두려움은 어떻게 됩니까?

질문
사라졌습니다.

 
질문
‘알 수 없는 것’은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이 함정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바로 당신이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불안감 속에서,
그 알 수 없음,
불가사의 속에서
모든 추구가 성취됩니다


그 불안감,
알 수 없음 안에서 완전히 휴식할 때,
그것은
자기의 진짜 얼굴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이며,

모든 두려움의 너머에 있습니다.
전적인 안도감은
전적인 불안감에서 일어납니다.

안도감과 불안감은
둘 다 개인적인,
분리된 나라는 느낌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나는 누구입니까?

개인적인 나가 없을 때
모든 두려움은 끝이 납니다.

 
질문
불안감을 직접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완전히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답
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다.
의식이 있습니다.
알아차림(awareness)이 있습니다.
아무 모습도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존재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텅 비어 있음을 들여다보고서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입니다.


그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개인적인 ‘나’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알아차림은
노력을 통한 알아차림이 아니며,
한순간도 끊임이 없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언제나 현존하는,
자연스러운 앎의 성품이다.


질문
그것이 바로 제가 찾고 있던 것입니다.

대답
(웃음) 맞습니다.
그 나를 찾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그 말은
마음이 자기 외의 다른 것들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를,
정작 자기에게는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전혀 없죠! (웃음)
그 말은
마음이 어떤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보여 줍니다.


질문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얼른 도달하지 못해서 생기는 실망감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대답
실망하는 이유는
원하고 기대하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질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대답
벗어나야 할 속박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배워 온

개념이고
생각이고
믿음일 뿐입니다.

질문
그것들이 모두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절벽에서 막 뛰어내린 것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것을 정말로 깨달았다면,
이미 뛰어내린 것입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깨달음은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당신을 어디로도 데려가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자연스럽고 직관적입니다.
모든 지식을 뒤로하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으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질문
모름 속에는 지혜나 사랑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분명히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불순한 점들만 더 많이 보입니다.

대답
그렇다면 당신은
모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판단 속에 있으며,
그것은 당신이
‘아는 것’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마음속에 있으며,
마음이 당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질문
그 말씀이 맞겠지만, 저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는 것은 에고의 순수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만 계속 보입니다.

대답
‘봄’(seeing)은
‘보이는 것’의 밖에 있습니다.

지혜는 거기에,
곧 ‘봄’ 자체에,
알아차림 자체에,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는
의식 자체에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곳은 그곳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각의 내용물에 집착하는 상태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 내용물을 의식하는 의식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지각의 내용물은 꿈이며,
중요하지 않으며,
환상이라는 것을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저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거의 항상, 아마도 언제나, 정말 실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대답


“ 저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라는 이야기를 버려 보십시오.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질문
알아차림만 있습니다.

대답
당신은 ‘그것’입니다.

질문
당신은 신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신이란 무엇인가요?

대답
신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알려면,
신에 대한 이미지와
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개념을 놓아 버려야만 합니다.

과감히
모든 개념을
       버
           린
               뒤,

완벽한 텅 빔,
완벽한 고요,
완벽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까지 신에 대해 배운
모든 것을 잊어야만 합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당신에게 위안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위안은
허구적인 것이며 환상일 뿐입니다.



마음의 모든 거짓 위안을
놓아 버리십시오.



그것들이
모두 끝장나게 하십시오.



그 최후는
고요함 속에서
온전히 경험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미지,
모든 개념,
모든 희망,
모든 믿음이 끝장나면,

고요함이 경험됩니다.

고요함의 중심을 경험하십시오.
그 속으로 뛰어들어 완전히 내맡기십시오.
고요함에 완전히 내맡길 때,
당신은 신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그 직접적인 경험 속에서
당신은
마음의 꿈에서 깨어나고,
신이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참된 당신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이 자유를 선택한다면,
삶은 매혹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갈 삶은
참나가 당신의 인간성과
보이지 않는 조화를 이루는 삶일 것입니다.

참나는
당신의 삶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은 예기치 않았던 길로 나아갈지도 모릅니다.

더 많이 내려놓을수록
더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
바로 매혹적인 부분입니다.

불안 속에
더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수록,
그것이 얼마나 안정되고 안전한지를
더욱더 알게 됩니다.

당신이 방금 빠져나온 곳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몹시 불행한 까닭은

항상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고 변하는 것들,
한정된 것들 속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