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텅 비어 있음

竹隱죽은 2024. 12. 26. 21:51

 

모습의 세계는 

당시의 나에게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배후에 있는

텅 비어 있음으로 도망쳐서

거기서 살고 싶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없애 버리고,

‘절대자’ 속에서

친구인 붓다와 머물고 싶었습니다. 

 

나는 

존재의 문제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즉, 

모든 것의 무상함, 

죽음의 필연성, 

허구적인 자아, 

모든 현상의 텅 비어 있음.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반응은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너무 멀리 나갔고, 

공(空) 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과 너무 멀리 떨어지다 보니, 

이제 세상은 내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無)라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었고,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었으며,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름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삶은 무미건조해졌고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거기엔 내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없었습니다. 

자아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상도 없었습니다. 

과거도 없었습니다. 

길도 없었습니다. 

미래도 없었습니다. 

사랑도 없었습니다. 

삶도 없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날마다 옥스퍼드 주변을 정처 없이 걸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도 없었고, 

기억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공(空)뿐이었습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 없는 영원 속에 잠겨 있던 때가 생각납니다.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주말이 지나가곤 했습니다. 

 

같은 순간에 

해가 뜨고 지며, 

비가 내리고 그치며, 

얼굴들과 목소리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는데, 

 

나는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공(空)만 실재했고, 

무(無)만 실재했습니다. 

 

세상은 이제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야의 이리(Steppenwolf)》에 있는 

헤르만 헤세의 글은 

마치 내 경험을 묘사한 것 같았습니다.

 

 

 

집도 친구도 보이지 않았고,

의자만 있었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무대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배역들을 연기하고 있었다. ……

시간과 세상,

돈과 권력은 소인배들과

얄팍한 사람들한테만 속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바로 그런 

진실한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여전히 ‘상대적인’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저 무지한 바보들,

자기의 ‘참된 본성’을 알지 못하는

저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비이원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이원성이란 

삶에서 멀리 거리를 두고 

텅 비어 있음 속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알지 못한 것은, 

삶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것이야말로 

완전히 이원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리를 두는 주체인

‘사람’이 있어야 하고,

멀어지는 대상인

‘세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평생 괴로움을 겪다가 

텅 비어 있음을 발견한 뒤, 

지옥으로 변해 버린 삶을 떠나 

그 텅 비어 있음으로 도피하면 

처음에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텅 비어 있음은 

또 하나의 함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완전히 놓친 것은, 

텅 비어 있음이 

완전한 충만함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음 속에 머물러 있었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그 머물러 있음을 행하는

‘나’가 있었습니다. 

 

텅 비어 있음은 

아직 충만함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 모든 것과 

사랑에 빠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모든 것이 향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 • •

 

 

마침내 

세상과의 거리는 사라졌습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마침내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거리를 두거나 

두지 못하는 사람이 죽었고, 

 

‘이것이 그것이다’라는 계시가 

어느 누구도 아닌 사람에게

찾아왔습니다. 

 

무미건조함은 사라졌고, 

완전히 말을 넘어선, 

완전히 언어를 넘어선, 

그 모든 것의 

절대적인 불가사의 속으로 

뛰어듦이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오랫동안 생기 없는 

무감각함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나는 

뒤로 물러앉아서 

나 없이 

세상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세상은 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실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나누는 일상적인 관계는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었고, 

세상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여전히 

삶을 부정하는 

‘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이거나 ‘깨어난’ 척했고,

안전하다고 느끼고 우쭐거리며

조금은 오만함까지 느꼈지만,

속으로는 공허감을 느꼈고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내가 처음 텅 비어 있음 속에서

발견한 자유는

감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모습 없음 속에서의 자유는

모습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불교의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왔습니다.

 

 

모습이 비어 있음이고 

비어 있음이 모습이니, 

 

비어 있음은 

모습과 다르지 않고, 

 

모습은 

비어 있음과 다르지 않다. 

 

모습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어 있는 것이요, 

 

비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습 있는 것이다.

 

 

• • •

 

 

그 다음,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모습에 대한 부정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말로 옮길 수는 없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쓸 것입니다: 

 

세상과 거리를 두었던 또 하루, 

텅 비어 있던 또 하루, 

옥스퍼드를 정처 없이 걸었던 

또 하루를 보내고, 

 

제프는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목초지의 잔디 위에 쓰러졌는데,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삶’이 말했습니다.

 

 

“살아, 제기랄, 살라고!”

 

 

비어 있음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습은 

비어 있음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습도 없고 

비어 있음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것’만 있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경이감만 남았습니다.

 

 

나무는 다시 나무였습니다. 

산은 다시 산이었습니다. 

강은 다시 강이었습니다. 

스타벅스는 다시 스타벅스였습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의자는 다시 

의자일 수 있도록 허용되었는데, 

동시에 물론 

그것은 신성의 표현이었으며, 

 

의자로 있는 게임을 하고 있는 

‘하나임’이었습니다. 

 

한 잔의 커피는 

한 잔의 커피일 수 있었습니다. 

 

생각은 

생각일 수 있었습니다. 

 

감각은 

감각일 수 있었습니다. 

 

슬픔은 

슬픔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이었고, 

 

아무것도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나의 것이 아니었기에 

모든 것이 나의 것이었습니다. 

 

 

 

말은 

그것을 전혀 담아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이 

바로 유일한 기적이었습니다.

 

 

세상으로 다시 뛰어들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겉모습뿐인 세상이었지만, 

 

비록 

모두 꿈이었지만, 

비록 ‘나’도 없고, 

‘남들’도 없었지만……. 

 

오랫동안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거리를 두고 싶어 했지만, 

 

갑자기 

‘지금 있는 것’ 속으로 

편안히 이완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아주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추구는 죽었습니다. 

구도자는 죽었습니다. 

 

제프는 죽었고, 

‘제프’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과 

부활은 하나였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도 없고, 

부활한 사람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궁극적인 메시지입니다.

 

   "경이로운 부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