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일시

‘나’란,
대상을 접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주체’로서의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나’ 홀로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만들어내는 큰 재료는
바로 이전 상태와의 동일시입니다.
그 동일시가 주체가 되고,
지금 상황을 만나
‘대상’으로 삼게 되면
그 둘 사이에
또다른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느낌’의
원천인 것입니다.
책상에 손을 대면 딱딱한 느낌이 들고,
솜털에 손을 대면 부드러운 느낌이 듭니다.
방안에 있던 ‘내’가
하늘을 보면 트인 느낌이 들고,
바다를 보면 출렁임이 ‘느껴’집니다.
그때
‘나’는 방이라는 좁은 공간과
동일시되어 있던 ‘상태’,
또는
출렁임이 없던 ‘상태’입니다.
그것이 넓은 하늘을 느끼고,
출렁이는 파도를 만나
새롭게 ‘느끼는’것입니다.
그렇게 전과정에서 생겨나는
하나의 느낌일 뿐인
‘나라는 것이,
우리가 그토록
붙잡고 의지하고 보호하려고 애쓰는
허구적인
‘나’의 실상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나’의 발현과정을 살펴봅시다.
‘나’는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개를 산책시킵니다. 오늘은 눈을 떴지만 몸이 피곤해 누워있습니다.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현재의 ‘나’입니다.
그런데 아침 7시가 되었으니 산책가자고 개들이 짓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것을 들으면 그동안 저 개들과 함께한 과정에서 생겨난, 개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이 떠오르며 ‘산책을 가면 그럴 것이다’라는
어떤 ‘느낌’이 생겨납니다.
그 느낌이 강렬하면
이제 그것이
‘나’로 동일시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채워주기 위해
일어나서 산책을 갑니다.
즉, 채워야할
그 ‘느낌’이
지금 이순간의 ‘나’입니다.
바로 이때
‘피곤한 나’가 ‘일어나서
산책 가야하는 나’로 동일시의 전환이
즉시 일어나지 않으면
그 둘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어
끌림과 밀침이 일어납니다.
즉 너무 피곤한 ‘나’는
산책 가야하는 줄은 알지만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런 밀침 또는 끌림이
감정의 원천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과거 경험에서 만들어진
무엇과의 동일시가
내적, 외적 대상을 만나,
지금 이순간의 어떤 느낌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매순간,
매상황에서 나타나는
‘나’라는 느낌은
그것의 본질적인 구조가 통찰되어도
그 느낌은
이미 형성된 에너지 덩어리이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관성이라고 합니다.
"관성을 넘어가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