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에 있음
내면을 바라보면,
우리가 무엇이든
생각보다 ‘우선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 이전에 있었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있고,
생각이 사라진 후에도 있을 것이다.
생각이 만들어내는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생각을 멈추자마자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본성이
생각하는 마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려면
어디에서 그 본성을 찾아야 하는가?
우리가 느끼는 것을 가지고 시작하라.
우리가 느끼는 걸 조사해보면
그 감각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있음 중 하나이다.
발아래 땅바닥은 어떤 느낌인가?
몸은 어떤 느낌인가?
마음은 어떤 느낌인가?
우리가 있는 공간의 느낌은 어떤가?
그런 감각들을 느껴보라.
느낌들은 오고가며 항상 변하므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우리일 수 없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느낌, 감각, 감정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나는 이런 식의 성찰을
항상 과학 실험을 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그렇게 엄격히 바라보아야 하기도 하고,
흐릿한 생각으로는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잣말을 할 수도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은 ‘내 생각이 곧 나인가, 아닌가?’이다.
그것을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생각을 멈추면 내가 사라지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생각에 기반한 자아는 사라지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건 우리의 의식이다.
그 의식이란 바로 지금
이 글의 내용을 생각하는 의식이고,
우리가 느끼는 걸 느끼는 의식이고,
우리가 보는 걸 보는 의식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자신을 찾으려고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더 자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찾고 또 찾는다.
그래도 결국 자아를 찾지 못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경험의 내용에서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경험의 내용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있다’는 건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항상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의식의 내용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의 가르침을 다시 보자. 그 가르침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내면을 바라보고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외부를 바라보고
내가 모든 것임을 아는 것이 사랑이다.
나의 삶은 이 둘 사이를 오간다.
마하라지는
“내면을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을 알 때”라고 말하지않았다.
그런 말은 마음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고 말했다.
이것은 계시이다.
즉 내면을 바라보고,
아무것도 없는 걸 아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 무無임을 아는 것이다.
그 무를 발견하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안도감, 자유, 행복, 평온이 일어난다.
그건 우리가 감각을 회복하는 증상이고,
영적으로 말하자면, 깨어나는 것이다.
-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