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저항, 외면, 달아남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는 시점이 오면,
내맡김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게 된다.
이 ‘내맡김’은
노력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 어떤 시도도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양쪽의 노력 모두가
단지 새로운 달아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합일상태는
언제나 기존의 사실이어서,
그가 하거나 하지 않는 짓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내맡김이 일어난다.
저항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저항의 해소이며, 또한 그 이전에 있는
합일상태의 자각이다.
이 근원적 저항이 해소되기 시작하면
그와 더불어 ‘분리된 나’ 역시 용해된다.
이쪽 편에 있는 당신이
저쪽 편에 있는 당신의 달아남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분리된 자아로서의 당신이
자신의 활동으로서의 저항을
바라본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실은 저항에 불과함을 깨닫기 시작하면
내면의 ‘분리된 나’라는 존재감 역시
하나의 저항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신’을 느껴보면,
느껴지는 것은 단지
작은 내적 긴장,
미묘한 수축,
미묘한 달아남일 뿐이다.
‘나’라는 느낌과 달아남의 느낌은
하나이자 동일한 느낌인 것이다.
이런 점이 명백해지면,
더 이상 ‘두 개’의 서로 다른 느낌은 없어진다.
경험자가 경험을 한다는 느낌은 없어지고 다만 한 가지, 모든 곳에 만연한 저항감만이 존재하게 된다.
당신이
이런 저항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이 저항감이다.
‘나’라는 느낌은 저항감으로 응축되고,
둘 다 용해된다.
이와 같이 근원적 저항이
해소되는 정도에 따라
세계로부터의 분리도 해소된다.
뭇 형상 그대로의 현재를 보지 않으려는
망설임과 저항에 대한
깊고 총체적인 포기가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안과 밖 사이에
스스로 세워놓았던 근원적 경계가
완전히 붕괴한다.
현재경험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게 될 때,
현재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려는
동기도 갖지 않게 된다.
세계와 나는
두 개의 별개의 체험이 아니라,
단일한 경험으로 되돌아온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파도뿐이며,
그 파도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파도 옮겨타기를
하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으면,
더 이상 경험이 우리를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도 없을 뿐만 아니라 끝도 없으며,
앞에도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기대로서의 미래 둘 다가
다만 현재의 사실로 보일 때,
이 현재를 가로막는
얇은 판은 붕괴한다.
‘이 순간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들이
‘이 순간으로’ 녹아들고,
달리 갈 곳 없는 이 순간만이 남는다.
한 노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억겁億劫이래 나란 놈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죽어도 달리 갈 곳이란 없도다.
아무 데도 없도다.*
* 《일휴도가一休道歌》
이렇게 해서
합일의식의 추구가
어째서 그토록 몹시나 안달 나게 하는 일인지
그 이유가 명백해졌다.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올바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애써온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브라만 ‘이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만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처럼 보였던 것조차
실제로는 브라만의 움직임이었다.
지금(Now) 이외에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의
최초의 ‘달아남’처럼 보였던 것도
실은 ‘지금의’ 원초적 움직임이었다.
본증묘수.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한 지금이
바로 그 움직임이다.
대양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적시면서
자유롭게 해변을 넘나든다.
- 무경계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