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심
일체 중생 안의 일심과 그 일심에 대한 이문인
진여문과 생멸문을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에 비유해볼 수 있다.
하얀 도화지에 온갖 색깔로 갖가지 모양이 그려진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늘 하얀 도화지에 주목하지 않고 그 위에 그려진 사물만 보게 된다. 도화지 위 그림은 더 그려져 늘어날 수도 있고 일부가 지워져 줄어들 수도 있다.
채색된 사물은 그렇게 생멸한다.
반면 채색된 사물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채색된 사물과 달리 생멸하지 않는 바탕이다.
그리고 채색된 사물은
흰색 도화지에 의거하여서만 존재한다.
즉 그려진 사물은 도화지 같이 실유가 아니라
도화지에 의거하여서만 존재하는 가유(假有)이며
따라서 자기 자체가 없고
도화지를 자신의 체(體)로 삼는다.
이 비유에서 도화지 위에 그려진 사물은 바로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즉 돌과 별, 나무와 새 그리고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물이 의거하는 바탕,
불생불멸의 도화지는 무엇인가?
그려진 사물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그 위에 채색된 사물에 의해 가려지므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림에서 사물만 보지 바탕인 도화지를 보지 않는다.
그렇듯 우리는 세계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사물만 바라볼 뿐 그 바탕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바탕(사물의 근거)을 찾고자 하면,
우리는 그 바탕을
사물과 다른 별개의 것으로 여김으로써
사물 바깥에 신(神)을 세우는 외재신론(外在神論)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그 바탕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 여김으로써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유물론(唯物論)을 주장하게 된다. 근거는 사물 바깥에 있거나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에 따르면
바탕은
그 위에 그려진 사물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생멸하는 사물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이 바탕을
기신론은 생멸하는 중생 안의 불생불멸의
‘진여심(眞如心)’이라고 부른다.
우주 세간 일체 제법은 도화지 위의 그림처럼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마음의 상(相)이며,
따라서 그림의 바탕인 도화지는
바로 그런 상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화지와 그림, 바탕과 사물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양면이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門)이지만, 문은 두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바탕의 도화지에서 그 도화지 위에 그려진 생멸하는 현상세계로 나아가는 문이 심생멸문(心生滅門)이고,
그려진 그림에서 그 그림의 바탕이 되는 불생불멸의 진여심으로 나아가는 문이 심진여문(心眞如門)이다. 그렇지만 문은 두 영역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은
방향만 다를 뿐 두 영역을 모두 포괄한다.
도화지가 그 위에 그려진 사물의 바탕이 되고 체가 되기에, 도화지의 성품이 그려진 사물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화지가 흰색이 아니고 검정색이면 그림 전체에 어두운 색감이 있을 것이고, 도화지가 빨강색이면 그려진 사물에도 붉고 따뜻한 기운이 돌며, 도화지가 파랑색이면 그려진 사물에도 파랗고 차가운 기운이 돌 것이다.
도화지가
본래적 자기 자각성, 본각(本覺), 불성(佛性)을
가지는 진여심이면, 어떻겠는가?
그 위에 그려진 일체 사물도
자기 자각성, 본각, 불성을 가질 것이다.
사물에 내재된 불성은 사물의 생멸하는 채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생멸의 상에 의해 가려진 바탕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도화지가 본래 마음이고 생명이기에, 그 도화지의 각 부분도 전체와 동일한 마음이고 생명이다.
마음이나 생명은
부분으로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의 진여법신이
모든 중생 안의 하나의 마음, 곧 일심이다.
이렇게 해서 마음 바탕에서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 성립한다.
기신론은 일체 제법이 의거하는 것이
대승의 유일한 법인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른바 (대승)법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섭한다.”
이는 곧 우리가 대상화해서
객관 세계로 인식하는 일체 제법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만든 그림,
마음의 경계라는 말이다.
하나의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의 차별상은 마음이 허망분별의 생각, 념(念)을 따라 그린 상(相)이다. “일체제법은 오직 허망한 생각(망념)에 의거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 강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