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본성에 대한 진실
우리 자신이 곧 의식이고 알아차림 자체임을
인식하는 것은 인생을 바꿀 만한 큰일이다.
이는 의미 깊은 통찰이고, 심지어 그 나름대로의 깨어남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생각이나 느낌과 동일시하는 데서 벗어나 자신이 의식·알아차림이라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경험으로 근본적인 전환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건 깨달음의 중간 지점이다. 아직 우리는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 그리고 알아차림·의식과 그것이 알아차리고 의식하는 대상들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본다. 반면에 그 다음에 일어나는 보다 깊은 깨달음의 상태에서는
인식하는 자 혹은 목격자 상태가 무너지고
주체와 객체의 인식이 무너진다.
이때 우리 존재의 본성에 대한 진실을 발견한다.
주체와 객체가 무너진다는 게 무슨 뜻인가?
그것은 어떤 경험인가?
이를 가장 잘 묘사하는 방법은
우리가 모든 환경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든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모든 곳이다.
다시 한 그루 나무를 생각해보자. 나무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우리가 배운 대로 나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추상적인 관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자연 세계의 대상들에 대해 편리하게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환원하여 어떤 부분은 희생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대상을 알게 되었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흙, 하늘, 비, 구름, 공간 같은 환경 없이는
한 그루의 나무가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아니요, 나무는 살기 위해서 태양에 의존하고,
흙에 의존하고, 비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나무는 그런 것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나무와 태양, 흙, 비와
하나로
함께 존재한다.
이런 통일성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긴밀히 결부된 전체로서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나는 전체이다.
나는 결코 전체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전체 아닌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몸, 머릿속 생각, 느낌, 온몸을 흐르는 피, 심장 박동, 호흡 등 우리를 이른바 ‘인간’이게 하는 모든 것은 전체 환경에 의존한다. 햇빛이 없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수십억 킬로미터 떨어진 차가운 우주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 대부분은 깨달은 존재이거나 성인이 아니라면 “내가 햇빛이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곧 그것의 환경이고,
환경은 곧 모든 개별적인 사물이다.
그래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이렇게 노래했다.
모래 한 알갱이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보려면,
그대의 손바닥으로 무한을 붙잡고
한 시간 안에 영원을 담아라.
이는 통일성의 경험과 유사하다. ‘유사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설명이 설명하는 그 자체와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설명을 가볍게 편안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성찰한다면,
언젠가 깨어나서
삶을 보고 경험하는 다른 길들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름 붙이고 분류하고
따로따로 분간할 수 있는 조각들처럼 경험하도록 배웠지만,
사실
그 조각들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없다.
환경이 없다면
그 조각들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환경이 없다면
지금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