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禪門

여기가 곧 종점이고, 여기가 바로 시작이다.

竹隱죽은 2021. 2. 9. 23:43



 

‘이 몸은 어디서 왔다가 

 죽은 뒤엔 어디로 돌아갑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꿀 때, 

 그 꿈이 어디서 왔다가 잠깬 뒤엔 어디로 가는가?’

 

‘꿈속에서는 없다 할 수 없고 

 깬 뒤에는 있다 할 수 없으니, 

 비록 있고 없음이 있으나 가고 오는 바는 없습니다.’

 

‘나의 이 몸도 꿈과 같다.’ 

 

                                    「傳燈錄」 司空山本淨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바로 ‘나’로부터 비롯된 망상의 흐름이다. 

무엇이 오고 가는 것일까? 

오고 가는 바는 없다. 

여기가 곧 종점이고, 여기가 바로 시작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인생의 시련으로부터 배워 

체험을 쌓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체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욕망을 따라 체험을 축적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 마음 그대로다. 

그러나 끊임없이 체험과 감각을 추구하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깨달음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곧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의 방식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그것은 단지 

어떻게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관찰하는 일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한다. 

 

물 한 잔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그 속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다. 

만약 우주가 없다면 

만물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 또한 물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잔의 물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도 있다. 나아가 그 속에 있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이 모두 물속에 공존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상호존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잔의 물 역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단순히 그것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 송이의 꽃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다면, 

이 순간들이 온전함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이미 우리는 온전함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