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곧 종점이고, 여기가 바로 시작이다.
‘이 몸은 어디서 왔다가
죽은 뒤엔 어디로 돌아갑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꿈을 꿀 때,
그 꿈이 어디서 왔다가 잠깬 뒤엔 어디로 가는가?’
‘꿈속에서는 없다 할 수 없고
깬 뒤에는 있다 할 수 없으니,
비록 있고 없음이 있으나 가고 오는 바는 없습니다.’
‘나의 이 몸도 꿈과 같다.’
「傳燈錄」 司空山本淨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바로 ‘나’로부터 비롯된 망상의 흐름이다.
무엇이 오고 가는 것일까?
오고 가는 바는 없다.
여기가 곧 종점이고, 여기가 바로 시작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인생의 시련으로부터 배워
체험을 쌓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체험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욕망을 따라 체험을 축적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 마음 그대로다.
그러나 끊임없이 체험과 감각을 추구하는
중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깨달음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곧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의 방식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그것은 단지
어떻게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를
관찰하는 일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한다.
물 한 잔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그 속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다.
만약 우주가 없다면
만물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 또한 물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잔의 물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도 있다. 나아가 그 속에 있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이 모두 물속에 공존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상호존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잔의 물 역시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단순히 그것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 송이의 꽃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다면,
이 순간들이 온전함으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이미 우리는 온전함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중에서